취직 안 돼서 뭐하고 사나 할 때 쓴 글인 듯...



‘인간의 모든 문제는 인간이 먹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 없다는 데서 비롯한다.’
밥을 굶은 지 사흘째 되던 날 유미는 생각했다. 유미가 회사를 관둔 지도 벌써 반년이 지났다. 처음 한두 달은 뭣도 모르고 그간 못 했던 일들도 하고 해외여행도 한 번 다녀오고 그러다 보니 평소 회사 다니던 때보다 돈을 훨씬 더 많이 써 버렸다. 아껴 쓰면 1년을 쓸 수 있을 거라 생각했던 돈이 두 달 만에 반으로 줄어들자 유미는 약속을 잡지 않게 되었다.
유미는 저번 달에 통신 계약을 해지한 스마트폰을 들고 집 근처 체육공원에 나와 와이파이 신호를 잡았다. 당장 돈을 받을 수 있는 일용직 아르바이트를 알아봐야 한다. 아니면 기본적으로 밥을 주는 음식점 일이라거나. 차비가 들면 안 되기에 되도록 가까워야 하고 복장 규정이 있어서 옷을 사야 한다거나 하면 안 된다.
평일 오전, 공원에 나와 있는 젊은 사람은 유미뿐이었다. 연세가 지긋해 보이는 어르신들이 어렵지 않은 운동기구를 이용하며 시간을 보내거나 손자와 놀아 주고 있었다.
유미는 식수대에 가서 물을 마신 후 아르바이트 사이트에 접속해 지역을 설정하고 화면을 훑었다.
‘<편의점 평일 오전> 하루 6시간, 식사 제공’
걸어서 5분이면 갈 수 있는 거리. 식사 제공이라고 해 봤자 폐기된 도시락을 먹을 수 있는 정도겠지만 그게 어딘가.
“안녕하세요. 아르바이트 모집한다는 글 보고 왔는데요.”
스마트폰을 들여다보고 있던 사장은 안경을 고쳐 쓰며 유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 그래요.”
손님 한 명이 들어왔다.
“잠깐만 기다려요.”
“네.”
손님은 담배 한 갑을 사서 금방 나가 버렸다.
“어디 살아요?”
“체육공원 근처요. 걸어서 5분 정도 걸려요.”
“아, 좋네. 나이는?”
“서른이에요.”
“음, 결혼은 안 했어요?”
“네.”
“서른이면 취직을 해야지, 왜 알바를 하려고 그래?”
“예?”
들어가는 회사마다 서열에 따른 사내 정치에 적응을 못 해서 관뒀다는 말을 해야 할까. 유미는 지속적인 관계, 관계 유지를 위한 노력을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을 하고 싶었다.
“언제부터 일할 수 있어요?”
“언제부터 일하면 되는데요?”
“그럼 오늘부터 해 볼래요? 알바생이 원래 오늘까지 나오기로 했는데, 어제부터 갑자기 못 나오게 됐다고 해서. 지금 내가 있으니까, 일 어떻게 하는지 보고. 내일이나 모레부터는 혼자 하고.”
유미는 얼떨결에, 생각보다 쉽게 일자리를 구했다. 유미가 찾아간 시간이 마침 오후 1시 50분쯤이어서, 사장은 2시부터 5시까지 세 시간 동안 일을 하라고 했다. 유미가 내일부터 일해야 하는 시간은 새벽 6시부터 낮 12시까지 6시간이다. 오늘의 두 배씩 일주일에 5일간 일을 하면 된다.
유미는 세 시간 동안 사장님을 따라다니며 관찰했다. 편의점 일은 손님이 오면 인사하고 계산하고, 바코드를 찍고 화면에 나오는 대로 진행하고, 물건이 빠지면 채워 넣고, 손님이 뭔가를 먹고 어지르고 가면 치우고, 그런 당연한 것들뿐이었다. 손님은 오래 머물러야 20분 정도였고, 한꺼번에 많이 와 봐야 4~5명이었다. 유미는 이 정도 일이라면 나도 충분히 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수고했어. 내일부터 6시에 나오면 돼. 근데 밥은 먹었어?”
“아, 못 먹었어요. 인터넷으로 찾아보고 바로 오느라.”
“식사는 손님 없을 때 눈치껏 폐기한 거 아무거나 먹으면 돼. 삼각 김밥, 샌드위치, 도시락 뭐 이것저것 있는데, 폐기한 건 폐기 찍어서 창고 냉장고에 넣어 놓거든? 이리 와 봐.”
사흘째 굶은 유미의 눈에는 폐기 냉장고가 고급 뷔페처럼 보였다, 라는 건 거짓말이지만 어쨌거나 침이 꼴깍 넘어간 건 사실이었다.
“알바가 안 먹으면 어차피 버리니까, 먹고 싶은 거 있으면 가져 가.”
유미는 마음 같아서는 다 들고 가고 싶다고 생각했지만 삼각 김밥 두 개와 샌드위치 하나를 고르고서 이 정도면 된 것 같다고 말했다.
“내일 올 때 등본이랑 통장, 이력서 들고 오면 돼. 늦지 말고.”
“네,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유미는 편의점에서 나오자마자 삼각 김밥 하나를 뜯었다. 삼각 김밥과 샌드위치가 든 편의점 봉투를 손에 들고 차디찬 삼각 김밥을 먹으며 집으로, 아니, 체육공원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너무나도 가벼웠다. 실은 너무 어지러워서 몸이 제 몸 같지 않아 발이 들썩이는 것이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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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15년 전쯤에 쓴 글인 듯. 실화 기반. 지금 내 꼬라지를 봐도... 다단계는 안 하길 잘한 게 맞는데... 허허. 참... 이때 이 분들은 뭐하고 계시려나. 다들 나보다는 잘살고 있을 듯하다는 생각도 들고. 어쨌든 자기 확신이 굉장히 투철한 사람들이었으니까. 성공에 대한 욕망, 삶에 대한 집착. 이런 게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의 차이...



“너 같은 애는 이거 안 하면 창녀밖에 할 게 없어.”
나는 팔뚝만 움켜쥐었다. 피가 흘러내렸다.
며칠 전 나는 영희 언니의 손에 끌려 이곳에 발을 디뎠다. 무슨 설명회를 한답시고 조그만 방에 수십 명을 몰아넣고서는 서너 명이 돌아가며 자기 자랑을 강의랍시고 해 댔는데, 사람만 바뀌고 내용은 같은 그 이야기들을 듣자마자 나가고 싶었지만 영희 언니가 조금만 더 들어보라며 붙잡는 바람에 그냥 남아 있었다. 강의가 끝나기도 전에 나간 사람이 1/4, 강의가 끝나고 나간 사람이 또 1/4, 하루 뒤 나간 사람이 또 1/4. 아직도 남아 있는 사람들 중 아직도 계약서에 사인을 하지 않은 사람은 나뿐이다.
영희 언니와 안 지는 2년 정도 됐다.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매일 아침 라디오를 듣다가 사연을 보냈는데 연극 입장권을 준다고 했다. 한 장이면 되는데 두 장을 준다고 했다. 학교에서 같이 밥을 먹거나 같이 수업을 듣는 동기는 있었지만 주말에까지 만날 수 있는 동기는 없었다. 공짜 표인데 팔기도 그래서 인터넷 연극 동호회에 같이 갈 사람을 구하는 글을 올렸더니 언니에게서 연락이 왔다. 어차피 남는 표였지만 내 덕에 공짜로 연극을 보는 건데도 언니는 고맙다는 말을 한다거나 밥을 산다거나 하지 않았다. 평소에 받는 걸 어려워하는 터라 크게 신경쓰지는 않았지만, 보통 사람들과는 약간 다른 언니였다. 잘 나가는 회사에 다니고 있다고 만날 때마다 자랑을 하면서도 밥을 한 번 사기는커녕 늘 돈이 없다고만 해서 오히려 내가 밥을 산 적이 더 많았다. 방학 때 고향집에 놀러오기도 했다. 전국 여행 중이라며 찾아온 언니에게 부모님은 여비로 쓰라며 돈까지 쥐여 주었다. 고등학교 졸업 후에는 나도 그만한 돈을 용돈으로 받은 적이 없는데도.
내가 언니에게 뭘 받았는지 따져 보면 딱히 받은 건 없었다. 뭘 받았는지 뭘 줬는지 따져 보면 인간관계라는 게 너무 끔찍해지는 것 같아서 의식적으로 따져 보고 싶지는 않았다. 만나고 싶어서 만나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나에게 딱히 나쁘게 한 일은 없어서, 연락이 오면 그냥 만났다. 거절할 수 있는 이유가 없었으니까.
만난 지 2년이 다 돼 갈 무렵, 영희 언니가 회사 사람들을 소개해 주고 싶다며 나를 회사 근처로 불러냈다. 영희 언니, 언니의 회사 사람 두 명과 함께 공원에서 도시락을 먹었다. 술집을 경영했다는 남자 한 명과 간호사를 했다는 언니 한 명. 그들은 지금 회사를 알게 되고 정말 좋은 회사라는 확신을 받아 하던 일을 접고 회사에 들어왔다고 했다. 밥을 먹고 산책을 하는 내내 영희 언니를 비롯한 세 명은 꿈에 젖은 표정으로 지금 다니고 있는 회사가 너무 좋다며 우리는 지금 너무나도 행복한 꿈을 그리고 있다고 얘기했다.
“수지야, 너도 우리랑 같이 하지 않을래?”
“수지 씨, 깊이 생각할 게 뭐 있어? 함께해요.”
세 명의 사람이 똑같은 표정으로 웃었다.
몇 주 뒤, 지하철역 입구에서 영희 언니를 기다렸다. 한여름 대낮의 거리는 한산했다. 간간이 사람들이 지나갔다. 언니는 언제나 늦었다. 처음 만났던 날에도 늦어 나는 표를 제공하는 입장임에도 한참을 기다리다 저녁을 먹지도 못 한 채 연극을 보고서는 그냥 헤어졌었다.
“수지야, 잘 왔어. 우리 커피라도 마실까?”
대낮의 커피숍 안은 텅텅 비어 있었다. 커피숍으로 오는 길에는 학교도 있고 주택도 있고 아파트도 있었는데, 왜 이렇게 텅텅 비어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오늘은 내가 살게.”
“월급 받으셨어요?”
“아니, 왜?”
“아니, 갑자기, 언니가 사신다고 하니까.”
언니가 웃었다. 언니가 시켜 준 아이스 음료는 너무 차가웠다.
“언니 일하는 회사 같이 가 보자. 알바 자리 하나 났거든. 너 알바 구한다며.”
“저 방학 때는 서울에 안 있을 거라서. 집에 내려가려고요.”
“왜?”
“굳이 여기 있을 이유가 없는 것 같아서요.”
“내려가기 전에 한 번 해 봐. 돈도 벌고, 좋잖아. 응?”
“언니, 혹시 이거 다단계 아니에요?”
“아니? 아닌데.”
“왠지 느낌이 그래서. 아니면 됐어요.”
언니를 따라 들어간 베이지색의 낡은 2층 건물 안에는 많은 사람들이 어지러이 서 있었다. 필름 상태가 좋지 않은 흑백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 것 같았다. 오래돼 보이는 실내, 뿌연 창문 사이로 들어오는 칙칙한 햇빛, 자기 갈 길을 모르는 듯한, 동공이 흐릿한 사람들.
“자자, 주목하세요. 여기 자기소개서 있는 거 가져가서 간단하게들 쓰시고요. 잠시 뒤에 강연 시작하니까, 다들 강의실로 들어가세요.”
안경 낀 남자가 박수를 몇 번 치고서는 목소리를 높여 말했다. 사람들의 시선은 한순간에 안경 낀 남자에게로 쏠렸다. 남자는 고가 브랜드의 옷을 입고 있었지만 싸구려 옷에 로고만 박아 놓은 느낌이 났다.
강의는 지루했다. 들어오는 사람마다 처음부터 끝까지 자기 자랑이었다. 이해가 되지 않는 점도 많았다. 꿈을 꾸라고 말하면서 돈을 버는 것에 집중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돈 얘기였다.
“제가 교대 나와서 교사 하다가 왜 관뒀는지 아세요? 이 사업의 미래를 봤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지금은 교사 연봉보다 더 많은 돈을 벌죠. 저처럼 되고 싶지 않으세요? 얼마 전부터는 저희 남편도 같이 일하고 있어요. 남편도 교사였는데, 제가 설득했죠. 왜 그랬겠어요?”
“제가 명문대 나와서 대기업 다니다가 왜 관두고 이걸 하고 있겠어요? 대기업보다 이게 더 좋으니까 그런 거예요. 저 지금 삼십대 초반에 BMW 끌고 다닙니다. BMW 다들 아시죠? 남자라면 다들 이 정도는 꿈꾸잖아요. 대기업 다녀 봤자 BMW 못 몰아요. 야근에 시달려 봤자 겨우 돈 몇 백 받는 게 다예요.”
그들의 꿈은 돈이었으며, 이 회사는 그들에게 돈을 벌게 해 줄 수 있는 곳이었다. 그들이 설명해 준 돈을 벌 수 있는 방법은 아주 간단했다. 내 밑으로 사람들을 차곡차곡 쌓으면 됐다. 그럼 내가 여기에 발을 디디면 영희 언니가 돈을 벌겠구나. 그리고 영희 언니는 영희 언니 위에 있는 사람의 주머니에 돈을 넣어 주겠지.
두 사람의 강연이 끝나고 쉬는 시간이 되자 몇 명이 소리를 지르며 나갔다.
“네가 친구냐?”
“이러려고 나 데리고 왔어?”
다시 강연이 시작되었다. 내용은 비슷했다. 강연이 끝나자 또 몇 명이 소리를 지르며 나갔다. 한 명은 뺨을 맞기도 했다.
“수지야, 어땠어? 감동적이지. 너도 저렇게 되고 싶지 않아?”
영희 언니는 소리를 지르고 욕을 하며 나간 사람들을 보고서도 평온한 미소를 띠고서 내게 물었다. 돈 때문에 아는 사람들을 팔아먹는 직업을 꿈꿔야 하는 이유는 뭘까.
“언니, 이거 다단계 맞는 것 같은데요? 그리고 전에 저한테 의류 회사 다닌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거기보다 여기가 더 좋아서 얼마 전에 옮긴 거야. 이거 다단계 아니야. 네트워크 마케팅이라고, 요즘 새로 나온 비즈니스 모델인데, 다단계라니. 너 내가 너한테 그런 거 시킬 사람으로 보여?”
언니의 말이 모두 거짓말처럼 들렸다. 그러나 사람을 함부로 의심하면 안 된다. 사람을 의심하기 시작하면 세상에는 믿을 수 있는 사람이 없다. 사랑도, 우정도, 진실도, 거짓말도, 그 어느 것도 믿을 수 없다. 나는 내가 거짓말을 하지 않는 것처럼 남들도 거짓말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다.
언니가 내게 거짓말을 해야 하는 이유가 있다면 그건 뭘까. 설마 돈 때문에 나한테 이런 거짓말을 한다는 말일까? 겨우 돈 때문에 나를 만나고 2년 동안이나 돈줄로서 관리하고 여기까지 불러서 거짓말까지 한다는 말일까? 그렇다면 언니는 너무나도 무서운 사람이고 내가 견딜 수 없는 사람이었다. 나는 언니의 말을 믿기로 했다.
“지금부터는 우리 같이 있어야 하니까, 일단 네 짐부터 여기로 옮기자. 어차피 조만간 방 뺀다며?”
“네, 짐은 대충 꾸려 놓긴 했는데.”
회사에는 사람이 많았지만 내가 짐을 들고 오는 걸 도와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나는 학교 앞 고시원에서 회사 근처 숙소까지 환승을 세 번이나 하면서 낑낑거리며 짐을 옮겼다.
회사 사람 몇몇이 함께 살고 있다는 방은 시장 근처 주택가의 반지하방이었는데, 곰팡이 냄새가 약간 나는 음침한 느낌의 방이었다. 구석에는 가방과 상자 따위가 쌓여 있었고, 반쯤 열린 창문 사이로 지나가는 사람들의 발이 보였다.
출근이라고 해야 할까. 정식으로 회사에 간 첫날부터 나는 영희 언니와 함께 사무실로 불려갔다. 부장인지 과장인지 하는 남자가 계약서를 들고 와 설명을 하며 사인을 하라고 했다.
“수지야, 같이 한 번 해 보자. 응?”
“사업 설명은 어제 자세히 들었죠?”
“네, 근데 이거 아무래도 다단계 같은데요.”
남자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다단계라뇨, 우리 그런 불법적인 단체 아니에요. 엄연히 법적으로 등록도 다 돼 있는 회사라고요.”
내 옆에서 함께 설명을 듣던 예쁘장한 여자는 다단계라는 단어를 입에 올리는 나를 이상한 눈빛으로 쳐다보다가 남자의 말을 듣더니 자기는 사인을 하겠다고 했다.
“저 요즘 학자금 대출 때문에 너무 힘든데, 휴학하고 이거 몇 달만 하면 4년 학비 벌 수 있다고 그래서, 맞죠?”
저런 말을 진심으로 믿는 머리로 학자금 대출을 받아 학교를 다녀 봤자 뭘 하냐는 생각이 들었지만 나는 타인을 마음 편히 바보로 여길 수 있을만큼 잘난 인간이 아니었다. 나도 학교를 계속 다녀 봤자 뭘 할 수 있을지 몰랐다.
예쁘장한 여자가 들뜬 표정으로 사인을 했다.
“수지 씨도 그냥 여기 사인만 하시면 돼요. 뭐가 그렇게 어려워요.”
“저는, 아무래도 안 되겠어요.”
“수지야, 너 왜 그래?”
남자의 미간이 또 찌푸려졌다.
“영희 씨, 좀 가만히 있어 봐요.”
언니가 허리를 바로 펴며 억지로 웃어 보였다.
“수지 씨, 우리 그럼 이렇게 할까요? 원래 교육 받고 여기 있고 하려면 기본금을 내야 해요. 물론 그건 우리가 대출해 주는 거예요. 수지 씨는 지금 뭐 대출 받을 만한 담보나 그런 게 없으니까 계약서에 사인만 하면 회사에서 그런 건 알아서 다 해 줘요. 복잡할 거 하나도 없어. 근데 수지 씨는 특별히 대출 없이 그냥 일주일만 있어 보는 걸로 할게요. 그러고 나서 결정하면 어때요?”
기본금이라, 그러고 보니 아까 그 예쁘장한 여자가 옆 테이블에서 대출에 대한 설명을 듣고 있었다.
“수지야, 이거 진짜 완전 좋은 기회야. 원래 다 교육비 내고 하는 건데, 너한테는 공짜로 해 주신다잖아.”
“근데 이거 제가 나중에 갚아야 하는 거 아니에요?”
“수지 씨, 걱정하지 마요. 안 받을게요. 일단 있어 봐요.”
일단 있기로 했다. 첫날 저녁으로는 아귀찜을 먹었다. 여기 오기 전에 만났던 언니의 동료들과 언니가 사 주었다. 그들은 밥을 먹는 내내 그들의 꿈에 대해 이야기했다.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더 많은 사람의 도움이 필요하고, 모두 더불어 살아가야 한다고 말했다.
아귀찜을 먹고 나오며 편의점에 들러 음료를 하나씩 샀다. 근처 공원에 앉아 음료를 마셨다. 얘기는 되풀이되었다. 공원에는 비둘기가 많았다. 비둘기들은 날개가 있는데도 멀리 날아가지 않고 나무 그늘 아래를 걷기만 했다. 가끔 날아오르기도 했지만 잠깐이었다. 날지 않는 비둘기들은 정체 모를 회색빛 덩어리처럼 보였다. 나는 길을 걷다 문득 비둘기가 되는 꿈을 꾸고는 했다. 가파른 언덕길을 오르거나 저 멀리까지 펼쳐진 바다를 볼 때면 눈앞이 아련해지며 깃털이 돋아나 비둘기가 되는 꿈을 꾸었다.
이튿날, 아침부터 준비하고 회사로 가야 했다. 영희 언니가 옆에서 늦었다며 재촉을 해 급히 옷을 갈아입으려 하는데 갑자기 전화가 왔다.
“여보세요.”
나는 전화를 받기 위해 집 밖으로 나가려 했다.
“수지야, 어디 가니?”
“전화가 와서, 잠시만요.”
“수지야, 같이 가자.”
내가 전화를 받는데 언니가 왜 같이 간단 말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은 딱 하나였다. 이게 다단계라는 걸 인정하는 것. 강연 내용, 사무실 분위기, 이런 단체 생활 등 인터넷 매체 등에서 접한 다단계와 모든 게 같았다. 그러나 언니가 정말 그런 사람일까. 나한테 여태껏 딱히 잘해 준 건 없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돈 때문에 나를 만났고 이제는 전화 받는 데 쫓아오기까지 하는 그런 사람일까.
언니의 눈치를 보며 통화를 짧게 끝냈다.
“근데 왜 전화 받는 데까지 따라오세요?”
“아, 우리는 단체 업무라서, 다른 사람들하고 단체 활동을 해야 하거든.”
회사에서 언니는 내가 화장실에 갈 때도 따라왔다. 나는 다른 사람이 있으면 긴장해서 소변이 나오지 않는다고 말했는데도 언니는 나가지 않았다.
“그럼 너 볼일 보는 동안 계속 손 씻고 있을게.”
두 번째 저녁은 왕돈가스였다. 고기가 질겼지만 김치 옆에 놓인 통조림 파인애플은 달고 달았다.
사흘째 아침은 컵라면이었다.
“수지야, 우리가 돈이 그렇게 많지가 않거든. 우리는 이제 시작하는 단계라서. 그래서 아껴야 해. 꿈을 위한 거니까, 우리끼리 컵라면만 먹어도 맛있어. 그렇지?”
며칠 지내면서 이야기를 나눠 본 회사 사람들 중 오갈 데가 없어서 여기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들의 말대로라면 모두 화목한 가정에서 자라났으며 고향에 집이 있고 부모가 있고 형제가 있는 사람들이었다. 통장에 돈도 어느 정도 있었다. 단지 BMW를 아무렇지 않게 살 만한 큰돈이 없는 것뿐.
“그런데 이거, 다른 사람을 이용해서 돈 버는 거 아니에요?”
“수지야, 내가 며칠 가만히 있었는데 너 첫날부터 지금까지 진짜 말 이상하게 한다. 이용이 아니라 같이 성장해 가는 거지. 꿈을 위해서.”
한 명이 성장하려면 다른 한 명의 피를 빨아야만 하는 게 동반 성장이라는 말은 태어나서 처음 들었다. 여기가 이상한 게 아니라면 세상이라는 게 원래 이런 곳일까.
부장인지 과장인지 하는 남자는 일주일의 여유를 준다고 하고서는 날 볼 때마다 계약서 언제 쓸 거냐고 독촉을 해 댔다.
“대출이랑 뭐 이런저런 것들에 동의하는 계약서인데, 내가 계속 설명했잖아요. 수지 씨, 뭐가 그렇게 문제예요?”
“저는 남의 돈 빌려서 뭘 하고 싶은 생각이 없어요.”
“아, 수지 씨 그렇게 안 봤는데 참 답답한 사람이네. 남의 돈은 무슨 남의 돈이에요, 성공해서 갚으면 되는데. 남의 돈이 다 내 돈 되고 그런 거예요.”
“수지야, 너 부모님한테 효도하고 싶고 그렇지 않아? 돈 벌어서 외제차도 사 드리고, 너 하고 싶은 것도 하고.”
외제차 사 드리는 게 효도라는 말도 23년 살면서 처음 들어봤다. 남을 이용해서 번 돈으로 외제차 사 드리고 효도했다며 좋아하는 자식이나, 그걸 받고 좋아하는 부모나 모두 멀쩡한 인간은 아닐 것 같았다.
“더 생각해 볼게요.”
남자가 또 미간을 찌푸렸다.
저녁에도 컵라면을 먹었다.
“수지야, 너 이것도 하나 먹을래?”
언니가 웃으면서 고구마 만쥬를 하나 건넸다.
“우리끼리 있을 때는 원래 이런 거 안 먹는데, 전에 보니까 네가 이거 좋아하는 것 같아서 특별히 사 주는 거야.”
“잘 먹을게요.”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했다. 남이 자신의 돈을 털어 사 주는 거니까. 어떤 목적이 있든 없든.
여기 와서 나는 하는 것도 없이 얻어먹기만 하고 있었다. 아침이면 사무실에 갔다가 낮에는 언니, 언니의 동료들과 골목을 헤맸다. 우리는 그냥 얘기를 하고, 또 얘기를 했다. 나라는 인간이 누군가와 그저 얘기를 하는 것이 컵라면을 얻어먹을 정도의 가치가 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보통의 경우라면 1시간 동안 힘들게 일해도 겨우 몇 천 원을 손에 쥘 뿐인데, 가만히 얘기를 듣고 있는 건 어느 정도의 가치가 있는 것일까.
“수지 씨, 난 수지 씨 처음 봤을 때부터 참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왜 우리랑 같이 안 하려고 해요?”
“그래, 수지야. 다들 너 괜찮게 보고 있는데.”
고마워해야 하는 걸까. 아마도 그렇겠지. 잘 알지도 못 하는 나라는 사람을 괜찮게 봐 준다는 걸.
편의점에서 컵라면을 먹고 돌아가는 길에 언니가 만화책을 보고 싶다고 했다. 숙소를 함께 쓰는 사람들끼리 우르르 만화 대여점에 갔다. 언니는 만화책을 쭉 둘러봤다.
“이거 신간 나왔네.”
언니는 가만히 서서 책을 촤르륵 넘겼다.
‘대여료 300원’
입구에 붙어 있는 큰 종이에 대여 금액이 나와 있었다.
“그냥 다음에 볼래.”
“안녕히 계세요.”
대여점 아저씨는 말이 없었다. 우리는 빈손으로 컴컴한 어둠 속에서 가로등 불빛을 따라 숙소로 돌아왔다.
뒤척거렸다. 잠이 오지 않아 뒤척거렸다.
“수지야, 안 자?”
영희 언니의 동료인 지혜 언니가 속삭였다. 지혜 언니는 회사에 와 보기 전에 영희 언니가 소개해 준 사람이었지만 여기 온 뒤 따로 얘기할 틈이 있었던 건 아니었기에 모여서 밥을 먹을 때 잠깐 얼굴이나 볼 뿐, 어색한 사이였다.
“우리 잠깐 산책이나 할까?”
나는 지혜 언니와 둘이서 밖으로 나왔다. 별도 없는 흐린 하늘은 컴컴하기만 했고 주택들 사이로 이어진 골목길에는 아무도 없었다.
“너 담배 피워?”
지혜 언니가 담배 피우는 건 처음 보았다.
“아뇨.”
내 대답을 들은 언니는 내게서 약간 떨어져 쪼그리고 앉아 얼마간 담배를 피우고, 길바닥에 비벼 불을 끈 후 어느 집 앞 쓰레기봉투에 넣었다.
“넌 왜 이거 안 하려고 해?”
“하기 싫어서요.”
“돈 벌기 싫어?”
“돈은 벌고 싶은데, 이런 식으로는 싫어요.”
“다단계 같아서?”
언니가 웃었다.
“네.”
“나도 처음엔 그런 줄 알았는데, 해 보니까 아니야.”
“해 보니까 어떠신데요?”
“내가 직접 해 보니까 듣기만 했던 거랑은 달라. 내가 직접 물건을 사서 판매도 하고, 그냥 내 사업 하는 느낌이랄까? 되게 괜찮아.”
그러고 보니 방구석에 있던 상자에 치약, 음료 따위의 이미지가 찍혀 있었던 것 같았다.
“뭐해?”
순간 닭살이 확 올라왔다. 영희 언니였다.
“자다 보니까 없어서 나왔어.”
지혜 언니도 영희 언니가 데리고 왔다고 했던 기억이 났다.
‘영희에게 얼마나 고마운지 몰라요. 지혜도 나도 영희가 소개해 줘서 여기 알게 됐거든요.’
술집 사장이었다는 남자가 웃으며 말했었다.
“그냥, 잠이 안 와서 수지랑 얘기 좀 하고 있었어.”
“아, 그래, 무슨 얘기?”
“그냥 이런저런, 인생 얘기. 아, 이제 졸리다.”
지혜 언니가 웃었다. 영희 언니도 웃었다. 어둠 속에서 어느 한 쪽의 웃음이 참 씁쓸한 느낌이 들었는데, 그게 어느 쪽인지는 알 수 없었다.
나흘째 아침에는 셋 다 늦잠을 잤다. 사무실에 들러서 인사를 하고 편의점에 가려는데 부장인지 과장인지 모를 남자가 말을 걸었다.
“수지 씨, 그리고 오늘은 사장님하고 저녁에 식사 같이 하기로 해 놨는데, 괜찮죠?”
“어머, 사장님요?”
영희 언니가 손을 맞잡으며 호들갑을 떨었다.
“수지야, 너 사장님 얘기 못 들어봤지. 엄청 멋진 분이야.”
사장님과의 저녁식사는 시장 변두리에 있는 허름한 호프집에서 이뤄졌다. 언니의 말에 따르면 사장님은 심심하면 해외여행을 다니고 돈이 너무 많아 매일 쓰기만 한다는데 그런 분이 왜 이런 데서 저녁을 드시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수지 씨, 얘기 많이 들었어요. 전부터 영희가 수지 씨 얘기 많이 하더라고. 착하고 꿈 많은 사람이라고.”
“아, 언니가 그러던가요?”
언니는 활짝 웃는 표정으로 사장님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왜 우리 사업을 안 하려고 해? 그렇게 꿈 많은 사람이.”
“네?”
“수지 씨 꿈을 이룰 수 있는 좋은 기횐데 왜 안 하려고 하냐고.”
“저는 돈 많이 버는 게 꿈이 아닌데요.”
“돈?”
“여기서 다들 돈 얘기밖에 안 하시던데.”
사장님이 땅콩 한 알을 씹었다.
“돈이 중요한 게 아니야. 우리가 말하는 건 꿈이에요.”
“여기서 말하는 꿈은 돈인 것 같던데요.”
“수지 씨 참 말귀를 못 알아듣는구나.”
말귀를 못 알아듣는다. 이런 말을 들은 후에는 늘 얻어맞거나 욕을 들었던 기억이 났다. 지금 박차고 나가야 할까. 그럼 언니는 어떻게 될까. 다른 사람까지 망쳐 버릴 수는 없었다. 심장이 두근거렸다. 마음이 아파지려고 할 때는 몸을 극도로 아프게 해야 마음이 보호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나는 손톱으로 팔뚝을 꾹 누르며 긁었다.
“내가 어떻게 사는지 알아? 낮에는 갤러리에서 전시 보고, 그림도 사고, 인디 밴드들하고 문화적으로 소통도 하고, 친분도 맺고. 심심하면 해외여행도 다니고 그러면서 여유롭게 살아. 수지 씨 지금 어때?”
나는 도록을 산 적은 있지만 그림을 산 적은 없고 밴드 공연을 보러 간 적은 있지만 밴드와 친분은 없고 가이드북 보는 걸 좋아하지만 해외여행을 한 적은 없다.
“나쁘지 않다고 생각해요. 돈은 별로 없지만.”
“수지 씨 참 재미있는 사람이네. 돈이 없는데 어떻게 나쁘지 않을 수가 있어? 바보야?”
사장님이 맥주를 들이켰다. 국산 맥주, 500cc.
“수지 씨 할 줄 아는 게 뭐 있어? 지금까지 해 본 건?”
“지금 대학 다니고 있고요. 이런저런 알바는 많이 해 봤어요.”
“지금 대학생이면 요즘 취업하기가 얼마나 힘든 줄 알겠네. 스펙 좋고 집안 빵빵한 애들이나 좋은 데 취업하는 게 요즘 세상이야.”
나는 좋은 스펙이나 백을 가져 본 적이 없었다.
“뭐라도 하고 살겠죠.”
나는 내가 뭘 해야 할지, 뭘 할 수 있을지 몰랐다. 그렇지만 눈앞에 있는 사장님처럼 되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런 생각으로 뭘 할 수 있는데? 수지 씨가 솔직히 예쁜 얼굴은 아니잖아? 몸매도 그저 그렇고. 대학도 인서울이긴 해도 손꼽히는 명문대는 아니잖아?”
팔에서 피가 조금씩 나기 시작했다. 언니는 맥주를 들이켜며 웃고 있었다. 충고랍시고 비난을 내뱉던 사람들이 생각났다. 그 사람들은 하나같이 내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아이라고 말했다. 자기들이 말하는 대로 해야 한다고 했다. 얼굴을 고치거나 남들이 하는 일을 따라 하거나 재밌지 않아도 억지로 웃거나 단순히 자기 지시에 따르거나 하는 따위의 일들을 주문하며 그대로 따라야만 내가 다른 사람들처럼 잘살 수 있다고 했다.
“요즘 얼굴 후지면 서류에서 떨어지고 몸매 후지면 면접에서 떨어지는 거 몰라?”
사장님은 선글라스를 쓰고 있어 눈이 보이지 않았다. 어떤 눈빛을 하고 있는지 보고 싶었다. 어떤 눈빛을 지니고 있어야 저런 말을 아무렇지 않게 내뱉을 수 있는 건지 알고 싶었다.
“너 같은 애들이 졸업해 봤자 뭘 할 수 있을 것 같아?”
춥고 가슴이 시렸다. 반박하고 싶었지만 내가 뭘 할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편의점 아르바이트라면 다시 할 수 있을까. 요즘은 그것도 경쟁률이 높았다.
“창녀밖에 할 수 있는 게 없어.”
사장님이 맥주를 바닥까지 쭉 들이켰다.
“수지 씨 같은 사람은 우리 일 안 하면, 창녀밖에 할 수 있는 게 없다고.”
피가 흘러내렸다. 흘러넘쳤다. 다른 사람 주머니를 털어서 내 주머니를 채우느니 내 몸을 팔아 돈을 버는 게 낫겠다는 말은 할 수 없었다. 그나저나 사장님 말대로라면 난 예쁘지도 않고 날씬하지도 않은데, 내 몸을 사려는 사람이 있기나 할까. 사장님이 날 너무 과대평가하고 있는 건지도.
“수지야, 사장님 말 잘 들었지? 내일 계약서 쓰자.”
언니가 웃으면서 내 등을 두드렸다.
“건배!”
언니가 내 잔에 자기 잔을 부딪치며 웃었다.
다섯째 날 아침에도 컵라면을 먹었다.
“해장도 되고 좋네.”
영희 언니가 웃었다.
“어제 사장님하고 얘기 잘했어? 그 분 멋있지.”
지혜 언니가 컵라면을 국물까지 다 먹고서는 웃으면서 말했다. 간호사를 하다가 이 일을 안 후 외국에 가는 꿈을 꾸게 됐다는 지혜 언니는 열심히 돈을 벌어 외국에 가서 살 거라고 했다. 간호사였기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지혜 언니는 언제나 상냥했고 잘 웃었다.
“수지 씨, 계약서 안 쓸 거예요?”
“일주일만 있어 보라고 하셨잖아요. 아직 일주일 안 됐어요.”
계약서 쓰라고 강요하는 것 말고는 하는 일이 없어 보이는 남자의 미간이 또 찌푸려졌다. 영희 언니도 따라 인상을 썼다.
“같이 들어온 사람들은 벌써 교육 다 받고 사업 시작했는데 수지 씨 혼자 이렇게 뒤처져 있어서야 되겠어요?”
나는 여기서도 뒤처져 있는 모양이었다.
“영희 씨가 신경 좀 써.”
누군가 내 앞에서 저렇게 말하면, 내가 신경쓰임을 당해 줘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독설을 하든 배려를 하든 나를 신경써 주는 사람의 마음을 상하게 하지 않으려면 나는 그 사람의 뜻대로 움직이는 착한 아이여야 했다.
“그리고 영희 씨, 이거 챙겨 가.”
남자가 ‘건강 음료’라고 전면에 크게 써 있는 상자를 영희 언니에게 내밀었다. 언니는 상자를 받기 전 종이에 사인을 하고, 상자를 뜯어 내게 음료가 담긴 팩을 하나 내밀었다.
“마셔 봐, 맛있어. 몸에도 좋대.”
저녁에는 회사 근처 분식집에서 떡볶이를 먹었다.
“여기 떡볶이 맛있지. 가끔 와서 먹는데 너무 맛있어.”
“아, 네, 맛있네요.”
빨간 밀가루 떡볶이에서는 조미료 맛이 잔뜩 났지만 언니의 웃는 얼굴을 보면서 맛없다는 말은 할 수가 없었다.
“내가 너한테 밥 사 주고 이런 거 다 내 주머니에서 나가는 거야. 벌써 며칠이나 됐어. 공짜라고 생각하면 안 돼. 알지?”
나는 언제나 사람들을 믿으려고 했는데, 사람들은 자꾸 내가 그들을 믿을 수 없게 되는 어두운 방으로 끌고 갔다. 눈을 가리고 입을 막고 거짓말만을 들려주었다. 가끔 진실을 이야기하면 그게 더 거짓말 같았다.
‘언니, 여태껏 언니가 저한테 얻어먹은 밥값이랑 저희 부모님이 드렸던 여비로 컵라면을 백 개는 넘게 살 수 있어요.’라고 나는 생각했다. 물론 말은 하지 못 했다. 이런 말을 하는 건 예의가 아니니까.
숙소 앞에 도착하니 지혜 언니가 숙소 옆 골목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왜 이제 와?”
“아, 떡볶이 먹고 오느라고.”
“저번에 갔던 거기? 맛있었겠다.”
“언니는 저녁 뭐 드셨어요?”
“나? 난 왕뚜껑.”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아닌 것 같아. 모두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걸 받아들이지 않으면 내가 미쳐 버릴 거야. 거짓말이 아니라고 해도, 이건 싫어.
“언니, 저 안 할래요.”
영희 언니의 표정이 싸늘하게 굳어졌다. 지혜 언니는 약간 씁쓸한, 그러나 착해 보이는 미소를 지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아닌 것 같아요. 그냥 집에 갈래요.”
“수지야, 너 여기서 관두면 평생 아무것도 못 해. 네가 다른 데 가서 다른 일은 할 수 있을 것 같아?”
“다른 일 못 해도 괜찮아요. 이건 아니에요.”
“야! 내가 너한테 어떻게 해 줬는데!”
영희 언니가 2년 만에 처음으로 소리를 질렀다. 처음으로 날 죽일 듯이 째려보았다.
“지혜야, 얘 간댄다.”
지혜 언니는 대답하지 않았다. 움직이지도 않았다. 나는 방으로 들어가 황급히 짐을 챙겨 나왔다. 영희 언니가 날 때릴 것만 같았지만 그런 일은 없었다. 언니는 그저 마지막까지 날 째려보기만 했다. 지혜 언니는 그 뒤에서 슬픈 표정을 지으며 손을 흔들어 주었다.
나는 뛰었다. 크고 무거운 가방을 양손에 들고 지하철역까지 혼자 뛰었다. 뒤따라오는 사람이 없나 가끔 뒤를 돌아보았지만 아무도 따라오지 않았다. 털썩, 바닥으로 가방이 떨어졌다. 긴장한 탓에 손의 힘이 풀린 걸까. 뒤돌아보니 회색 깃털이 바람에 실려 날아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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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쓰려고 놔뒀었는데 더 쓰지 않았던... 한 십 년 전에 쓴 것 같은 글.



그 여자, 고양이를 좋아하는 것 같다.
담배를 피우러 옥상에 나갔다가 그 여자가 쪼그리고 앉아 고양이를 쓰다듬고 있는 모습을 본 적이 있다.
누렇고 뚱뚱한 고양이였다.
나랑 비슷하다. 누렇고 뚱뚱한.
내 피부가 누런 건 황인종인데다 선크림을 안 바르기 때문이고 내 이가 누런 건 골초이기 때문이고 내 배가 나온 건 밤마다 라면을 먹고 자기 때문이다.
그 고양이가 누런 것도 태어날 때부터 정해져 있던 것일 테고, 뚱뚱한 건, 글쎄. 그 여자가 뭔가 먹을 걸 주는 모습은 아직 본 적이 없어 녀석이 뭘 먹는지 모르겠다. 고양이가 뭘 먹고 사는지 난 잘 모른다. 설마 쥐를 먹지는 않겠지.
누뚱이(편의상 내가 붙인 이름이다. 발음에 주의하지 않으면 늦둥이처럼 들린다.)는 평소에는 집에 들어가 잠만 자는지 꼬리도 보이지 않는다. 옥상 구석에는 녀석의 집과 밥그릇이 덩그러니 놓여 있고 가끔 그녀의 빨래가 바람에 가벼이 나부낄 때면 꽤 괜찮은 풍경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녀의 옥상과 나의 옥상은 꽤나 가까워 옥상에 그녀가 있으면 난 언제나 다른 곳을 보며 담배를 피운다. 그녀도 아마 담배 피우는 남자를 싫어하겠지. 싫어하진 않더라도 어쨌거나 좋아하는 여자는 별로 없으니까. 그렇지만 그녀와 내가 가까워질 확률은 잘 모르겠고 내가 담배와 멀어질 확률은 아주 낮으므로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가끔 누뚱이 혼자서 옥상을 어슬렁거리고 있을 때는 누뚱이를 바라보며 담배를 피우기도 하는데 연기가 바람을 타고 그쪽으로 넘어갈 때면 녀석은 흠칫 놀라곤 한다. 처음에는 내가 문을 열고 나타나기만 해도 눈을 동그랗게 뜨며 집으로 뛰어들어가던 녀석이었는데, 이제 익숙해졌는지 별로 신경도 안 쓰는 듯하다. 아니면 내가 자기와 비슷한 부류라는 걸 알아차렸는지도 모르지.
햇살 좋은 봄날에 하릴없이 옥상에서 어슬렁거리는 누렇고 뚱뚱한 존재.
이렇게나 비슷한데 왜 녀석은 귀여움을 받고 나는 아닌 것일까. 기이한 일이다.

옥상에 널어 뒀던 빨래에 또 담배 냄새가 배 있다.
옆집 남자 때문인 것 같다. 내가 옥상에 올라가면 나름 구석에 가서 피우긴 하던데, 내가 안 보이면 그냥 돌아다니면서 피우겠지.
사람이 넘어올 수 있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를 담배 연기가 못 넘어올 리 없다. 혹시 우리 집 옥상에서 피우는 건 아닐까 싶기도 하다. 누렁이의 털이 갈수록 더 누래지는 게 그 사람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하루이틀도 아니고 탈취제를 뿌리는 것도 귀찮다. 누가 웬 담배 냄새냐고 하면 남자친구가 담배 피우면서 빨래를 널어서 그렇다고 말해야지. 사람들은 의외로 '이걸 믿어?' 싶은 것들을 믿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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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에 쓴 글.



모닝콜 소리에 눈을 떴다. 반쯤 들어오다 마는 햇살에 눈이 따갑다. 기지개를 켜며 꿈지럭거리다 리처드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의 두꺼운 책등에 머리를 찧었다.

"기도합시다."
기도손을 하고 눈을 감았다. 눈을 감으니 다른 감각들이 곤두선다. 좋은 향기가 난다. 2의 긴 머리를 휘감고 있는 체리 향 샴푸 냄새.
교회 뒤에 자리한 널찍한 마당에 다 같이 모여 국수를 먹으며 크리스마스 트리를 어떻게 꾸밀 것인가에 대해 논의했다. 크리스마스가 며칠 남지 않았다. 내 생일도 못 챙기는 주제에 남의 생일을 챙길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지만 어쨌거나.
국수를 다 먹고 그릇을 갖다 놓으러 갔는데 집사인지 장로인지 하는 아저씨가 십일조는 언제부터 낼 거냐고 묻는다.
"얘는 아직 제가 전도 중이에요."
2가 집사인지 장로인지 하는 아저씨를 향해 웃어 보이며 보이지 않게 내 등을 떠민다. 엉거주춤 움직이는 내게 2가 귓속말로 천천히 내도 된다고 속삭였다.
"천국 가면 다 돌려받는 거긴 한데, 너는 아직 안 내도 돼."
"으응, 그렇구나."
"1아, 나는 네가, 정말, 음, 정말 구원 받아서 나랑 같이 천국 갔음 좋겠어."
"아, 그래, 정말, 고마워."
'지금 당장 같이 가자고 해도 갈 수 있니?'라고, 혼자 생각만, 했다.
"십일조는 네가 정말 내고 싶을 때, 그때 내면 돼."

일요일 아르바이트까지 빼고 교회에 나가게 된 건 2의 전도 때문이었다. 아니, 전도한 2 때문이었다.
셔터를 내린 가게 안에서 나는 걸레질을 하고 2는 돈을 세고 있었다. 잘 지워지지 않는 자국이 있어 박박 걸레질을 하다 팔이 아파 눈을 감으니 체리 향 샴푸 냄새가 났다.
"너 내일 뭐해?"
종소리에 침을 질질 흘리는 파블로프의 개처럼, 2의 목소리만으로 손끝이 저려 왔다.
"내일 출근해야지."
2가 머리를 뒤로 젖히며 까르르 웃었다.
"내일부터 여름휴가잖아. 5일 동안."
나는 잠깐 멍하니 서서 이달의 날짜들을 계산했다.
"딱히 할 거 없겠네, 그럼. 너 나랑 우리 교회 갈래?"
"교회?"
난 교회도 성당도 하나님도 하느님도 좋아하지 않는다고, 그의 아들과 며느리도 좋아하지 않는다고 덧붙이고 싶었으나 2의 기분을 상하게 하고 싶지 않았기에 입을 다물었다.
나는 2의 근처로 발걸음을 옮겨 더럽지도 않은 카운터 위를 닦았다. 그녀의 포니테일에서 나는 냄새에 걸레를 쥔 손이 간질거렸다. 2의 머리카락을 만지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지만, 용서받기 힘든 충동만 느끼며 살아온 나는 저지르기보다 억누르는 데 익숙한 인간이다. 살짝 통통한 손가락으로 터치 스크린을 꾹꾹 누르며 정산을 마무리하는 2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2가 고개를 돌릴 기미가 보이자마자 다시 걸레질에 집중했다.
"1아, 나는 네가 구원 받았으면 좋겠어. 그래서 나랑 같이 천국 갔음 좋겠어."
"천국?"
그딴 게 있다고 믿는 인간들의 머릿속이 궁금하다는 말이 목구멍을 찔러 댔지만, 침을 꿀꺽 삼키며 그 말도 함께 넘겨 버렸다.
"학교에서도 여기에서도, 그냥 널 볼 때마다 그런 생각이 들었어."
"학교에서 날 봤다고?"
"늘 같은 시간에 같은 일을 하고 있으니까. 전공실 갈 때마다 자판기 청소하고 있고, 책 빌리러 갈 때마다 책 정리하고 있으니까."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이렇게 여기 서 있을 수 없으니까.
"그랬구나, 아는 척하지 그랬어."
"바빠 보여서. 널 볼 때마다 바빠 보이고, 지쳐 보여서. 그리고 나랑 아르바이트도 같이 하는데 늘 바쁘니까, 일 끝나고 같이 커피라도 마시자거나 하기도 그렇고."
돼지국밥보다 비싼 커피 같은 건, 사 마실 돈도 없어.
"아, 요즘 좀 바쁘긴 했어."
"아무튼, 그래서. 뭐랄까, 마음이 평화로워질 수 있는 곳을 알려 주고 싶어서, 그래서."
"어, 근데 나는 종교 같은 거 안 믿는데."
2의 눈망울이 흔들거리며 침을 꼴깍 삼키는 게 보였다.
"사실, 며칠 전에 네가 학생식당 구석에서 울면서 밥 먹는 걸 봤거든."
망할.
울면서 밥을 먹었던 건, 순전히 돈 때문이었다.
백반이 지긋지긋해서 뚝배기 불고기 정식을 먹고 싶었는데, 딱 100원이 모자랐다. 어제 방세를 내 버려서 통장에도 돈이 없는데, 통장 잔고를 몇 번이고 계산했지만 카드를 긁을 수 없었다. 나는 할 수 없이 백반을 주문했는데, 하얀 주방모자를 쓴 아주머니가 '달걀후라이 소진'이라고 적힌 종이를 백반 받는 곳 앞에 붙이고 있었다.
하루 한 번 먹는 식사인데 100원이 모자라 제일 싼 메뉴를 먹어야 하고, 시간을 못 맞춰 달걀도 못 먹게 됐다는 사실에 갑자기 머리가 뜨거워지며 눈물이 왈칵 솟았다. 콧물을 훌쩍거리며 휴지를 몇 장 뽑아 식당 제일 구석으로 향했다. 조용히 콧물을 닦으며 밥을 먹었다. 한 숟가락 퍼 넣을 때마다 눈물이 한 방울씩 흘러내렸다. 콧물을 닦았던 휴지를 조심스레 접어 눈물도 닦았다.
머릿속으로 빠르게 영상이 재생되며 얼굴이 화끈거렸다. 나는 다시 고개를 숙이고 걸레질에 집중했다. 2가 계산대 서랍을 밀어넣는 소리가 들렸다.
"다음부턴 혼자 밥 먹지 말고 나랑 같이 먹자."
"어, 시간이 맞으면, 그러자."
"내일 딱히 할 거 없으면 교회도 같이 갔으면 좋겠는데."
"아, 근데 좀, 피곤해서."
"종일 있는 거 아니고 그냥 아침 예배만 같이 보고 가면 괜찮지 않을까? 난 네가 정말 구원 받아서 행복해졌음 좋겠어."
그리고 벌써 반년째, 나는 2와 함께 교회에 다니고 있다. 자신을 믿어야만 천국에 들어올 수 있게 해 준다는 치사하고 이기적인 신을 내가 믿게 될 리 없지만.
내가 믿는 건 2에게서 나는 향기, 그녀의 솜털 같은 목소리와 속삭이는 발걸음 소리 같은 것들.
"자, 옆 사람과 손을 잡고, 함께 노래 부릅시다."
언제나 나를 자기 옆에 앉히는 2의 손을 잡고 노래를 부른다. 몇 번을 불러도 가사가 외워지지 않는 노래를 열심히 부른다. 2의 손가락 사이사이를 꼼지락거리고 싶다는 충동이 일 때마다 눈을 꼭 감고 더 크게 노래를 부른다. 당연하게도, 가사를 틀린다. 내가 가사를 틀릴 때마다 2는 노래를 부르다 말고 까르르 웃는다.
교회 앞마당에 세워진 커다란 트리가 나를 내려다본다. 어두운 밤하늘로 치솟은 커다란 금색 별 하나.
"크리스마스 예배도 같이 올 거지?"
나를 올려다보는 2의 새까맣고 촉촉한 눈동자를 보면, 뭐든 그녀가 하자는 대로 맞춰 주고 싶어진다. 그렇지만 그녀가 나를 먹여살려 줄 건 아니니까.
"그날은 일해야 해. 전날에도 일해야 하고."
2는 개강 후 아르바이트를 관뒀다.
"크리스마스 즈음에는 다른 애들이 다 일하기 싫다고 해서, 사장도 일하기 싫다고 하고. 원래 사장이 아침조잖아. 그때부터 마감까지 쭉 하면 시급 더 쳐 준다고 하더라고."
"같이 열심히 준비했는데, 트리도 꾸미고 선물도 만들고."
"그래도 일해야 하니까, 어쩔 수 없어."
2는 시무룩해질 때면 오른쪽 볼에 바람을 넣는다. 잘 부푼 풍선껌 같다. 콕 찔러 터트려 버리고 싶다.
"다른 사람들이랑 재밌게 놀아. 나도 일 끝나고 시간 봐서 연락하든가 할게."
교회 앞에서 헤어진다. 2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는데 2가 고개를 돌려 손을 흔든다. 나도 손을 흔들고, 뒤돌아선다.
이틀치 일당을 평소보다 더 쳐 준다고 해도, 십일조를 낼 돈 같은 건 없다. 장학금을 받아도, 아르바이트를 해도, 보증금 없는 옥탑방에 살아도, 하루에 한끼만 먹어도 왜인지 늘 돈이 부족하다. 다시 고시원에 들어가야 하나. 고시원에 들어간다 해도 아낄 수 있는 건 전기세, 물세 정도다. 맛없는 밥과 김치만 먹는 생활을 반복하면 밥값도 아낄 수 있겠지만.

휴대전화를 켰다. 잠에 찌든 근시안은 큰 숫자밖에 읽지 못한다. 오전 8시라는 건지 오후 8시라는 건지 모르겠다. 눈을 쓱쓱 비비고 다시 화면을 들여다봤다. 오후 8시다. 오전 아르바이트 후 나도 모르게 잠들어 버렸는데, 5시간이나 자 버렸다. 또 밤새겠군, 작게 중얼거리며 기지개를 켰다. 아야, 나도 모르게 소리가 튀어나왔다. 문에 부딪힌 손등이 아팠다.
문고리를 돌려 밀고 부엌으로 향했다. 더러운 물컵들 중 하나를 골라 한 번 씻어 물을 받았다. 방으로 돌아가 조용히 물을 마시려는데 벽이 미세하게 흔들거렸다. 작게, 작게, 더 작게, 억누르는 신음과 함께 방이 움직였다. 물을 머금고 바닥에 누워 꼴꼴거리며 물을 넘겼다. 컵이 더러워서인지 물맛이 더러웠다.
부엌에 물컵을 갖다 놓고 오다 옆 방에서 나오는 남자와 마주쳤다. 몸을 돌려 비켜 줬다. 여성 전용 고시원인데, 간혹 남자들과 마주친다. 그가 목발을 짚고 쿵쿵거릴 때마다 헝클어진 머리카락이 고시원 벽과 함께 흔들렸다. 남자는 나가다 말고 총무 아저씨와 인사를 했다.
징검다리처럼 뚝뚝 떨어진 기억들 사이로 남자의 모습이 오락가락하며 필름이 되감기다 멈췄다. 오늘 새벽 6시께 편의점에서 콘돔을 사 갔던 남자다. 목발을 짚고 와서 콤돔을 두 개 사 갔다.
나머지 하나는 언제 쓸까, 문득 궁금해졌다.
고시원에 대한 기억은, 이런 것들. 과제 파일 사이에 끼어 죽어 있던 개미떼, 갈라진 타일 바닥, 더러운 녹색 물컵, 누런 찌꺼기들이 들러붙어 있던 밥-수입 쌀로 지은, 옥상에서 빨래를 널 때 가끔 마주쳤던 이름 모를 여자들, 복도와 계단에서 스쳐지나간 그녀의 남자들.
그리고 계단 옆에 놓여 있던 스펀지가 튀어나온 소파에 앉아 담배를 피웠던 기억 따위. 옥상 문틈으로 새 나오는 햇빛이 담배를 든 손가락 끝을 환하게 만들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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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LoveLoveLove  (2) 2023.05.19

死のうと思った로 검색해 봤더니 아마자라시/나카시마 미카의 僕が死のうと思ったのは만 잔뜩 나왔다.

내가 죽으려고 생각한 건-에 대해 글을 써 볼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물론 아름답지 않겠지.



내가 죽으려고 생각한 건
나를 싫어하는 사람이 내 생일을 축하해 줬기 때문
나를 싫어하면서 어째서
진심이 아니겠지 그럼 어째서
아니면 평소에 싫어하는 척하는 걸까 어째서

내가 죽으려고 생각한 건
옥상에서 내려다본 풍경이 스산하기 그지없어서
다른 아이들 앞에서는 웃고
내 앞에서는 날 노려보던 옛 시절의 친구가 같이 놀자고 다가와서
그 아이가 사는 아파트 옥상에서 아래를 내려다보았었어
한없이 깊던 공기 속을

내가 죽으려고 생각한 건
웃으며 다가와서는 나를 짓누른 사람이 끝까지 웃고 있었기 때문
나는 피를 흘리고 있는데 그는 웃고 있었어
원했던 건 다 이뤘다는 거였으려나
나는 피를 흘리고 있었는데
(끝까지 사과 한마디 듣지 못했다
그럴 인간이 아니니 그랬겠지)

내가 죽으려고 생각한 건
한강 다리가 너무 길어서
밥 먹을 돈도 버스 탈 돈도 없어서
어느 날 한강 다리를 혼자 건넜었어
밥도 못 먹고 버스도 못 타고 아르바이트를 하러 가던 길이었어

내가 죽으려고 생각한 건
내게 노래를 불러 준 사람들조차 다가오다 말아서
사람들은 왜 타인의 마음을 떠보지 않고는 못 배기는 걸까
애매한 마음들에 나는 웃어야 할지 고개를 돌려야 할지 모르겠어서
애매한 마음에는 애매하게 웃어 줄 수밖에 없어서

내가 죽으려고 생각한 건
인간이 좋아지지 않아서
멀리 있는 우상만을 좇게 될 뿐
곁에 있는 인간이 좋아지지 않아서
가장 가까이에 있는 나조차도

... 내가 죽으려고 생각한 건
서른 해 넘게 살아 봤지만 살고 싶어지지 않아서
해마다 해마다 죽고 싶다는 마음을 삼키며 나이를 먹어 왔지만 살고 싶어지지 않아서

... 내가 죽으려고 생각한 건
나만을 위해 손 내밀어 줄 사람이 이 세상에 없어서
내가 손 내밀고 싶은 사람도 나에게는 없어서

... 내가 죽으려고 생각한 건
태어나서 이 세상을 누리게 됐다는 감사를 나는 느껴 본 적 없어서
이딴 세상 안 태어났으면 좋았을 텐데 하는 생각뿐이어서

내가 죽으려고 생각한 건
살아도 살아도 앞이 보이지 않아서
갈수록 끔찍해질 뿐이어서

(그래도 살아가고 있다
죽으려고 '생각'한 것뿐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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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urawasanatorium.com/death/

もう死にたいと思うときの生き延び方 - 浦和神経サナトリウム

小さなことに喜ぶ 人間にとって幸福とは、人並み外れた成功とか、栄光、賞賛、勝利ではありません。 では、何か

urawasanatorium.com

우울해서 이래저래 검색하다 보게 된 글인데 좋아서 번역.
원문은 허락 받고 퍼 온 건 아니고 그냥 퍼 온 것...


우라와 신경 새너토리엄
원장의 에세이 아카이브


이제 정말 죽고 싶다고 생각할 때의 더 사는 법

 


작은 일에 기뻐한다

 인간에게 있어 행복이란, 보통 사람을 뛰어넘는 성공이라든지, 영광, 상찬(칭찬), 승리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무엇인가. 행복이란 단언컨대 주관적인 것입니다. 오늘, 숨을 쉬며 살아 있는 것. 이것은, 무척이나 축복받은 것입니다. 주위의 경치를 돌아보는 것. 오늘의 공기의 냄새를 맡는 것.

 마음은 흐린 하늘입니다만, 왜인지 머리 위를 올려다보니 푸른 하늘입니다.

 홀로 있을 수 있는 것, 혹은, 가족이 있는 것.

 꿈꿀 수 없는 환경, 생각대로 되지 않는 상황. 그러나, 손이 있고, 눈이 있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가만히 손을 바라보세요. 오랫동안, 일해 준 손입니다.

 


심호흡을 한다

 먼저, 이 글을 읽기 전에, 심호흡을 합시다. 들이마시고 내뱉는다. 오랫동안 내뱉읍시다. 가능하다면 일어서서, 천천히 7초간 내뱉읍시다. 몸에 힘이 들어가 있지 않습니까? 얼굴 근육의 힘을 뺍시다. 어깨를 편하게 합시다. 힘을 뺍시다.

 세상은 당신에게 그렇게 많은 걸 요구하고 있지 않습니다.

 심호흡을 세 번 반복합시다. 마음은 컨트롤할 수 없지만, 몸은 움직일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는 건 관두자

 성공이라는 것, 승리라는 것, 칭찬, 거대한 성과, 탁월한 능력, 보기 드문 미모, 쌓아둔 재물, 그것이 사라지는 건 시간 문제입니다. 만약, 해당되는 게 있다면 감사합시다. 그러나, 그런 것은 영속적인 것이 아닙니다. 또한, 예를 들어, 사람들의 기억에 남는다고 하여 도대체 무엇이 된다는 말입니까.

 거꾸로, 의미 없는 인생이라든가, 아무것도 안 하고 있다든가, 아무 도움도 되지 못한다든가, 밥벌레 등의 말을 듣는다고 해도, 그것이 나중에 어떻게 된다는 것일까요. 같은 듯한 인간에게, 자신은 더 훌륭하다고 하는 자존심이나 우월감을 부여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은 아닐까요. 그런 의미로서는 다른 이에게 공헌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만.

 다른 이의 성공이나 다른 이의 실패에, 모두들 그렇게까지 관심을 갖지 않습니다.

 그러니, 다른 이와 비교하여 자신은 안 된다는 생각으로 괴로워하는 건 관둡시다. 단지, 다른 이와 비교하여 자신은 뛰어나다고 생각하는 것보다, 못났다고 생각하는 편이 더 나은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고독과 친구

 친구가 있냐, 없냐가 문제가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친구가 없는 사람은, 무언가 문제가 있는 게 아니냐는 풍조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미신은 신경쓰지 않아도 됩니다. 친구는 무조건 필요한 건 아닙니다.

 신경을 쓸 일이 없는 고독은 좋다. 다른 이에 대해서는, 긍정적인 관심을 조금 가지는 정도면 괜찮습니다. 같이 어울리자고 해 주는 사람이 없는 것은, 귀찮은 일이 없어서 최고입니다. 거절하는 데 쓸 에너지도 아낄 수 있습니다.

 친구가 없는 원인이 자신의 성격이나 행동거지에 있는 건 아닐까 하고 생각하여 속앓이를 하는 것은 관둡시다. 그것은 잘못된 인식입니다. 친구가 없는, 훌륭한 고독, 번잡스럽지 않은 생활을 즐깁시다.


정신과, 심리 치료 진료를 받는다

 죽고 싶어졌다면 정신과 치료를 받읍시다. 적절한 치료를 받음으로써, 그릇된 자살을 막을 수 있습니다. 근년의 자살 수의 감소는(일본 기준. 원문 작성 2021년, 갱신 2022년) 항우울제의 영향이 크다고 사료됩니다. 잘 사용하면, 그런 작은 것이, 사람의 목숨을 구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정신과의 진료소, 병원, 정신과 의사를 잘 이용해 주세요. 당신의 부하라고 생각하면 편합니다.

 생물학적인 것이 우울증에 작용하는 또 하나의 경우를 이야기합시다. 조울증의 치료로, 리튬의 약을 씁니다. 원소 기호는 Li입니다.

 각지의 수돗물에 자연적으로 포함돼 있는 리튬의 농도는 각기 다릅니다. 미국의 연구에 따르면, 리튬의 농도가 높은(이라고 해도 미량) 수돗물을 마시고 있는 지역의 자살률은, 리튬 농도가 낮은 지역의 자살률보다 유의미하게 낮았던 것입니다. 이것은, 큐슈에서도 확인되었습니다. 수원의 영향을 받는 것입니다.

 인간은, 미처 생각이 가닿지 않는 것에 지배당하고 있습니다. 재밌는 일인데, 인간은 원인을 잘못 발견하여, 그 원인과 싸우고 있는 도중에, 생각지도 못한 과정이 진행되고 있어, 결과적으로 사태가 달라져 있다든가 하는 일이 있습니다. 그럴 때, 인간은 자신이 발견한 원인이 해결책이 된 덕분이라고 생각하는 일도 있습니다.


죽는 것을 미뤄라

 사람에 따라 다릅니다만, 죽고 싶다는 마음이, 강해졌다고 생각하면, 조금 있으면 가라앉기도 합니다. 파도 같기도 하지요.

 죽고 싶어 견딜 수가 없어도, 다음날이면 어떻게든 차분해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렇게 파도가 있습니다. 죽고 싶다는 마음이 의식 속에서 옅어져 갑니다. 다시금, 죽고 싶다는 마음이 온다면? 다시금, 시간이 흐르기를 기다립시다. 허나, 그 사이에, 무언가의 대책, 치료를 시작하는 것을 추천합니다.

오늘은 암울한 기분인 채로 괜찮습니다. 불완전한 채로 잠에 듭시다.

 시간이 약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단언컨대 유효합니다.



죽는 것은 정당한가?

 자살은, 그릇된 인식에서 비롯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자면, 상실. 가까운 사람의 죽음, 연인에게 차였다, 경제적으로 절망, 되돌릴 수가 없는 실패. 아니, 그 어떤 것이든, 죽음에 비견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뿐이랴, 인간은, 정말이지 평생 보상받지 못하니까 죽는 편이 낫다고 생각해 버립니다. 이것이 인지 착오입니다. 간단히 절망하는 쪽으로 치우쳐 버립니다. 인간의 어떠한 실패도 상실도, 인생을 저버릴 만큼의 일은 아닙니다.

 상실은 새로운 출발이기도 합니다. 다시 시작할 수 없는 실패는 없습니다. 말하자면, 정당한 자살이란 건 어디에도 없습니다.


나 혼자만이 괴로워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지는 않은가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의 인생은 무거운 짐을 지고 먼길을 떠나는 것과 같다. 서두르지 말지어다.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을 당연하다 여기면 부족함 없으리. 마음에 바라는 바 떠오르면 곤궁했을 때를 떠올리시구려.'

 천하의 대장군일지언정 이렇습니다. 간단히 말하자면, 불행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범인(凡人)이, 쉽게 쉽게 살아갈 수 있을 리가 없습니다.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하여도 당연한 것. 자신만이 괴로워하고 있다든가, 자신만이 운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인식의 착오입니다.

 또한, 이에야스는 이렇게도 말하고 있습니다. '모자란 것은 넘치는 것보다 낫다'. 모자라다, 능력이 모자라다, 성과가 모자라다, 미모가 모자라다, 돈이 모자라다, 재능이 모자라다. 운이 모자라다. 그 편이 실은 좋은 것이다. 긴 안목으로 보면 그 편이 좋은 것이라는 것입니다.

 자신만이 불행한가? 아뇨. 대부분의 사람은 대체로 행복하지는 않습니다. 부러워할 정도로 행복하지는 않습니다.


약자라면 죽는 편이 나을까

 약자로 있는 것은 좋은 것입니다. 강자는 약자가 받쳐 주고 있습니다. 약자가 없다면 강자로 있을 수 없으니까요. 우수하다는 평을 듣는 사람은, 우수하지 않은 사람이 받쳐 주고 있습니다. 경제적 강자는 경제적 약자가 받쳐 주고 있습니다. 훔쳐지는 건 훔치는 것이 받쳐 주고 있습니다.

 아등바등 일하는 사람과 아등바등 일하지 않는 사람은, 서로 지탱해 주고 있습니다. 채워 주고 있습니다.

 성과를 내는 사람은, 성과를 내지 못하는 사람에 의해, 자신의 가치가 명확해지고 있습니다. 성과를 내지 못하는 사람에게 감사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생명의 전화에 전화해 봅시다. 훈련된 분들이 이야기를 들어 줍니다.



항우울제를 먹는다

 항우울제의 매출 증가와 자살률의 감소와의 사이에는, 유의미한 관계가 있습니다. 교략인자라는 게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죽고 싶다'의 원인이 생물학적인 문제를 배경으로 한 것이라고 한다면, 항우울제를 바르게 복용함으로써, 회복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아니 대부분의 자살에는, 최종적으로는 생물학적인 문제가 중첩돼 오기 때문에, 올바르게 대처해야 합니다. 정신과나 심리 치료 진료를 받읍시다.

 항우울제는, 원칙적으로 한 종류의 약을 충분한 양, 충분한 기간 사용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효과가 나타날 때까지 몇 주가 걸리는 것이 보통입니다. 적정하게 사용한다면, 효과가 발휘될 확률이 높습니다.

 그 사이에는, '기다림'이라는 자세가 중요합니다.


일을 쉰다 집안일을 쉰다

 일이 있는 사람이라면, 일을 쉽시다. 사람과 대면하는 것도 무리해서 할 필요는 없습니다. 상태가 나쁘다는 것을 주위에 알립시다. 이해해 주는 사람과 이해해 주지 않는 사람이 있는 게 보통입니다. 이해해 주지 않는 사람이 있어도 당연하다고 생각하도록 합시다. 그것을 이러니 저러니 고민할 필요는 없습니다. 의사에게서 진단서를 받읍시다.


위인에게서 배운다

 아카이브에서 소개한 것처럼, 위인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의 대부분이 우울함을 겪은 적이 있습니다. 우울함을 뛰어넘은 위인들에게서 삶의 방식을 배웁시다.

 죽고 싶어졌다면, 자신이 위인과 비슷한 성질이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기로 합시다. 그리고, 위인들이 어떻게 우울함과 맞섰는지, '위인의 우울증' 등 이 아카이브를 봐 주세요.


새로운 게 아니라, 수리・수선을 한다

 우울 상태일 때, 새로운 것을 하는 것은 부담입니다. 이러저러한 '고침'을 합시다. 보수, 수리, 퇴고, 수선, 그 외. 청소도 원래대로 되돌린다는 의미에서 수선이지요. 그것도 대단한 일이 아니라, 작은 일로서 괜찮습니다.


비생산적으로 살자

 생산성이 높은 것은, 좋은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언제나 좋은 것이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비생산적이라는 것은 나쁜 것은 아닙니다. 비생산성을 지향합시다. 생산적인 사람이 평가받는 것은, 비생산적인 사람이 있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비생산적인 사람은 생산적인 사람을 받쳐 주고 있다는 말입니다.

 가치관이 잘못돼 있지는 않나요? 뭔가를 잘하는 사람만이 대단한 것은 아닙니다. 뭔가를 갖고 있는 사람만이 대단한 것은 아닙니다.

비생산적으로 살자


잔다

 자 버립시다. 대부분의 문제는, 생각함으로써, 노력함으로써 해결되지 않습니다. 자 버립시다. 멀리 도피합시다.


역설적・노블레스 오블리주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라는 말이 있다고 합니다. 프랑스에서 생겨난 말로, 「noblesse(귀족)」과 「obliger(의무를 부담시키다)」를 합성한 말이라고 하는데, 재력, 권력, 사회적 지위를 지키기 위해서는 책임이 따른다는 것을 가리킨다고 합니다. 라고 인터넷에서 알게 되었습니다.

 복 받은 사람은, 그에 응하여 다하지 않으면 안 되는 사회적 책임과 의무가 있다고 하는 서양 사회의 도덕관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왠지, 약간 으스댄다는 인상을 받습니다. 복 받은 인간에게만 의무가 따른다는 것은.

 잘난 인간은, 잘나지 않은 인간이 다수 있기 때문에, 스스로가 잘난 인간이 돼 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잘난 인간이 잘난 인간으로서 있을 수 있는 것은, 잘나지 않은 인간이 있다고 하는 공헌 덕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잘난 인간이 있기까지 그 사람의 노력도 재능도 있었을 수도 있겠습니다만, 잘나지 않은 인간이 다수 존재하고 있다고 하는 게 가장 큰 이유입니다.

 복 받지 않은 인간에게는, 더 고귀한 의무가 있는 듯합니다. 그것은 위에 쓴 것처럼 바르게 바라보고, 자신을 비하하거나 하지 않는 것입니다. 아마도.


자신의 존재 의의

 자신의 존재 의의가 없으니까 살아 있어도 별 수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존재 의의가 있다고 할 수 있는 사람이 있습니까? 자신의 존재 의의를 필요로 한다는 것은, 과도한 걸 바라는 게 아닐런지요. 겐자(源左; 독실한 정토종 신자로서 위인으로 모셔지고 있는 듯) 등의 묘호인의 입을 빌리자면, 그와 같은 생각은 '깜짝 놀랄 일'이라는 것입니다. 우쭐대고 있다는 것입니다.

 존재 의의가 있는 사람은 위인일까요?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위인은 위인이라고 불리기 때문에 위인이 되었습니다. 위인을 만드는 건, 위인이 아닌 사람입니다. 위인이 존재 의의를 절감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은 보통입니다. 존재 의의가 없다고 생각하고 있는 사람이 오늘도 살아가고 있는 것은 위대한 일입니다.


도움이 되지 않는다

 도움이 되는 인간은 귀중합니다. 이 세상에 공헌하고 있습니다. 자신은 도움이 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사람이 살아 있는 것은 편한 일입니다. 보통입니다.

 도움이 되지 않는다, 장점이라고는 없다. 오히려, 모두에게 부담이 되고 있다. 세상에는 도움이 되는 인간과 도움이 되지 않는 인간이 있다고 할 때, 도움이 되지 않는 인간이 대단한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어느 한쪽의 역할을 떠맡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한다면, 도움이 되지 않는다, 폼이 안 난다, 부끄러울 듯한 도움이 되지 않는 인간이라고 하는 역할을 수용한 인간이 대단할 수밖에 없습니다. 평정을 유지하고 있는, 도움이 되지 않는 인간이 더욱 대단한 것입니다.

 도움이 되는 인간은, 도움이 되는 것을 자신의 구심점으로 삼아 살아 있는 약한 인간입니다. 도움이 되지 않는 인간은, 자신의 구심점이 되는 것을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채로 살아 있는 강한 인간이 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타인에게서 이해받지 못한다

 타인에게서 이해받고 싶다고 하는 생각을 갖고 있지 않습니까? 타인을 이해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타인에게서 이해받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그렇기에, 타인이 생각 없는 말을 해도, 매정한 처사를 해도 놀랄 만한 일은 아닙니다. 인간은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이 어떤 일인지 모르는 법입니다.

 그게 보통입니다.

 타인에게서 무언가 신경 쓰이는 말을 들었을 때, 문제가 되는 것은 다른 이의 차가운 말이 아니라, 나는 역시 안 되는 인간인 게 아닐까 하고, 스스로 자신을 탓하고 마는 것입니다. 다른 이는, 실은 나를 상처 주려고 한 게 아닙니다. 자신을 상처 입히는 건 자기 자신입니다.


중요한 것

 중요한 것은 무엇이냐고 한다면, 그것은 모두에게 평등하게 주어진 것입니다. 성격이나 가정, 재능, 좋은 반려자, 경제력은, 평등하게 주어져 있다고는 할 수 없겠지요. 평등하게 주어져 있는 것은, 예를 들자면 살아 있다는 것. 그러므로, 그저 살아 있다는 것은, 위에 열거한 다양한 것들보다 더욱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힘낼 필요도 이길 필요도 성공할 필요도 없습니다. 무언가를 할 수 있는 것, 무언가에 뛰어난 것은, 살아 있는 것에 비한다면 가치가 없는 것입니다.


하늘을 올려다본다

 푸른 하늘, 비는, 죽고 싶은 사람에게도 불우한 사람에게도 성공한 이에게도 평등하게 주어지고 있습니다. 평등하게 주어지고 있는 것은, 가치가 높은 것입니다. 불평등하게 편재돼 주어지고 있는 것의 가치는 한정적입니다.


살아 있는 가치

 살아 있는 가치의 최대치가 100이라고 칩시다. 100을 점하고 있는 것은, 그저 살아 있다고 하는 것뿐입니다. 단지 살아 있음으로써 100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공과 실패, 부유와 빈곤, 칭찬과 비난, 명예와 치욕, 행복한 결혼 생활과 이혼. 건강과 병, 이것들은, 얼만큼을 차지하는 걸까? '1'입니다. 살아 있는 것 100에 대해 그저 1일 뿐입니다.
 그러니까, 인생 가운데 무언가 있었다고 하더라도 살아 있는 가치는 없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모순적입니까? 인생은 모순적인 것입니다.

개도 안 걸린다는 여름 감기에 사람이니까 걸리는 거라는 우스갯소리도 있더라만
더운 와중에 으슬으슬 춥고 추운 와중에 식은땀이 맺히는 여름 감기는 지독하기만 하다

뒤척일 때마다 터져 나오는 재채기에 딸려 나오는 콧물
염증 반응이랬던가 어쨌던가 하며 하루에도 수십 번 코를 풀어댄다

방 안에 갇히다시피 하여 이리 뒤척 저리 뒤척
에취 훌쩍 팽 으으의 반복

퉁퉁 부은 편도로 침을 삼킬 때마다 즉각즉각 찾아오는 통증에 밤새 잠 못 이루고
어느 샌가 잠드는 걸 포기하고 뒤척이기만 한다

누가 꼭 안아 줬으면 좋겠어 싶을 때마다 혼자서 이불을 둘둘 감고
추웠다 더웠다 반복하는 여름 감기를 달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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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불에 땀이 밴다
흐트러진 이불깃과 내 셔츠

양 인형은 가만히 누워 있다
내 말을 다 들어주고 늘 웃고 있는 내 친구

머리맡과 발 밑에는 택배 상자가 쌓여 있다
이삿짐을 반년째 풀지 않았다
언제 어디로 떠날지 몰라서

어디로 떠날지 몰라서 아팠다
언제는 크게 중요치 않다
어디로 누구를 만나러 떠날지 몰라서 아팠다

초콜릿은 아직 꺼내 먹지 않았다
밸런타인 가방은 이삿짐 위에 고이 모셔져 있다
내 망상의 증거물



눈의 초점이 맞지 않아 세상이 흐리게 보인다.
휴대폰으로 글 쓰는 게 버겁다.
일기도 아니고 시도 아닌 그냥 잡문을 쓰면서
오늘 하루를 되돌아본다.

촉망받는 시인이 되고 싶다? 그런 꿈을 꾼 적은 있다. 시도 열심히 안 쓰면서. 한때 많이 쓴 적은 있었다. 나름 열심히 썼었다. 대학원 가면 좋겠다는 교수님 말씀은 따르지 못했다. 돈 많이 들어서.
인정받는 소설가가 되고 싶다? 마찬가지. 잡지사에서 딱 한 번 답장이 온 적이 있었는데 소설 분량을 좀 늘리라는 내용이었는데 늘리기 싫어서 그냥 내 블로그에만 올려 뒀고
화가가 되고 싶다? 마찬가지. 난 그냥 내 삘대로 막 그리고 싶을 뿐.
디자이너가 되고 싶다? 이건 먹고살려고 생각했을 뿐 되고 싶다는 생각은 그다지. 디자인 센스도 없는 것 같고
가수가 되고 싶다? 제일 열심히 한 게 이거다. 사고(난 이제 과거의 아픔들을 사고로 부르려 한다)를 겪으면서도 하려고 했던 게 이거다.
못 이뤄서 제일 슬퍼하는 것도 이거고.
이런저런 가능성들을 스스로 포기한 것을 제일 후회하는 것도 이거다.
내 몇 달치 월급을 들여서라도 하고 싶었던 게 이거다.
가수의 뜻은 노래 부르는 사람. 단순히 가수가 되고픈 거라면 유튜브에 올려도 된다. 법륜스님 말씀을 떠올려 본다. 난 가수가 되긴 되었다. 인기 가수가 못 되었을 뿐.
시? 소설? 등단을 못했을 뿐 쓰긴 했다.
만화? 데뷔를 못했을 뿐 인터넷 웹툰 도전 카테고리에 올려져 있긴 하다.
다 이런 식이다.
고로 먹고살기 위해서는 다른 일을 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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쏟아지는 재난 문자
더위를 조심하란다

엄마에게 물 한 통이라도 챙겨 가라고 여러 번 말했지만 괜찮다며 그냥 나가 버렸다

나는 혼자 앉아 방에 걸린 오래된 사진들을 보며 저때는 행복했던 것 같은데 생각한다

옛날 일을 떠올리려 하면 떠오르는 건 폭력의 기억
내가 이 사람 저 사람한테 두들겨맞았던 것
내가 욕을 달고 살았던 것
뭐 그런 것

좋았던 기억은 대체 어디로 숨어 버린 걸까

가끔 오는 포토 알림
추억의 사진들
저때는 행복했던 것 같은데 또 생각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많이 울었었다
사진은 진실이면서 거짓
사진 속에서 웃고 있는 나와 사진 밖에서 울고 있던 나

사진들을 내다버리길 잘했다
추억하고 싶은 기억을 그즈음 혹은 그 사람과의 마지막; 혼란과 슬픔이 집어삼켜 버린다
기억 상실을 바라며 나는 머릿속에서도 기억들을 지워 나간다

떨쳐내려 할수록 더 들러붙는 기억의 장면들
하나하나 떼내어 불사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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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조 주택의 여름에서는 찜질방 냄새가 난다
백수 주제에 에어컨 켜기가 죄스러워 선풍기로 버티자니 땀이 맺힌다
한여름 며칠은 괜찮겠지 하며 에어컨을 켜 뒀다가 좀 시원해지면 끄고 선풍기를 틀어 둔다

엄마는 오늘도 복숭아를 깎고
나는 오늘도 누워 있다가 복숭아를 먹기 위해 일어나 앉는다

망가진 복숭아를 잔뜩 사 와 손질하는 엄마
나는 같이 깎기가 귀찮아 괜히 복숭아 좀 그만 사 오라고 엄마를 타박한다

내가 하는 집안일이라고는 설거지뿐인데 그마저도 저녁에는 하지 않는다
내가 밥을 먹지 않기 때문에
; 방 밖으로 나가지 않기 때문에

점점 더 아무것도 안 하게 되면서 나는 숨만 붙어 있는 밥벌레 비슷한 게 되어 간다
나는 일부러 나를 몹쓸 인간으로 만들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 내가 죽을 때 아무도 슬퍼하지 않도록

엄마는 부엌에서 묵묵히 복숭아 한 상자를 깎고
나는 방으로 도망쳐 와 이런 글이나 끄적인다

엄마가 남 몰래 우는지 안 우는지 나는 모른다

쓰러져 죽어가던 걸 살려 놨더니 어쩌고 하던 엄마 말이 맞는지도 모른다
나는 그냥 쓰러져 길바닥에서 죽는 게 나았을 인간인지도 모른다

복숭아 깎다 껍질을 너무 두껍게 깎는다고 핀잔을 들었던 나는
복숭아 깎기를 연습하는 대신에 방구석으로 도망쳐 이런 글을 끄적인다

이 세상에 존귀하지 않은 생명은 없다는데
나는 내가 이 세상에 속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뒤늦게 가서 체면치레로 썩은 복숭아 몇 개를 손질하고는
다시 방으로 돌아와 이런 글을 끄적인다

죽을 날만 기다리는 사람처럼 아무것도 하지 않으며
한 달 두 달 흘려보냈다
; 엄마는 내가 자살 충동을 느끼는 것 같다고 했다
방을 어둡게 해 놓고 아무것도 하고 싶은 게 없다고 한다고

복숭아는 잘 문드러진다
문득 나랑 닮았다는 생각이 든다

어둑한 방
손에서 복숭아 냄새가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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