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 노란 캐리어
(2013~2014년쯤 쓴)


끼이익 소리를 내며 한 여자가 들어선다. 좁은 현관에 발을 디디고 서 있는 모습이 왠지 아슬아슬해 보인다. 신발을 벗고 고개를 들자마자 목례를 한 후 이름을 말하는 그녀.
꽉 찬 신발장을 위아래로 훑더니 신발장 위에 신발을 올려놓는다.
"예약 확인 부탁드립니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더니 다시 고개를 돌려 등에 멘 배낭에서 주섬주섬 종이 한 장을 꺼낸다. 나는 종이를 복사한 후 그녀에게 돌려주었다. 정말 일부러 그런 건 아니지만, 원래대로 손바닥만하게 접은 종이를 돌려줄 때 그녀의 손등을 살짝 만져 버렸다. 내 손가락 위에 그녀의 손등, 그녀의 손바닥 위로 내가 올린 종이 한 장, 그 위로 파르르 떨리는 내 손가락.
숙소를 안내하기 위해 안내 데스크에서 나와 그녀의 옆에 선다. 노란 머리 색깔과 똑같은 노란 캐리어를 든 손이 힘겨워 보인다.
나는 남자답게, 가볍지 않은 그녀의 캐리어를 가볍게 들어 방까지 안내한다. 그녀는 작은 목소리로 고맙다고 말하며 내 뒤를 졸졸 쫓아온다. 나는 그녀가 잘 따라오고 있는지 슬쩍 고개를 돌려 확인한다.
오래된 주택을 개조해 만든 2층짜리 게스트하우스의 계단은 조금만 힘을 줘 걸어도 삐걱 소리가 난다. 여성용 공동 침실 안에는 이층 침대 네 개가 있다. 지금 남은 자리는 두 곳. 하나는 아래층이라 편하지만 머리맡 쪽의 커튼이 제대로 닫히지 않는다. 하나는 넓지만 문 바로 앞이고 이층이라 계단을 오르내리기가 약간 무서울지도 모른다.
"어느 쪽이 좋으세요?"
내 설명을 제대로 듣고는 있는 건지 두리번거리던 그녀가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어느 쪽이든 괜찮다고 말한다.
"그럼 여기로 할게요. 1번 자리예요."
'네-' 그녀의 작은 목소리가 귓가에 웅웅거린다.
"여긴 문 앞이라 캐리어를 놓기가 좀 그런데 다른 분 침대 앞에 같이 두실래요, 아님 침대 위에 놓으실래요? 공간은 있으니까."
그녀가 다시 두리번거리며 입술을 살짝 뗐다 깨물었다 뗐다 깨물었다 한다.
"가까운 데가 좋아요, 떨어진 데도 괜찮아요?"
그녀가 살짝 미간을 찌푸린다.
"아, 짐이 너무 무거워서 위에 올리기는-"
나는 그녀의 말을 듣다 말고 남자답게 캐리어를 번쩍 들어 이층 침대 위에 올린다. 남자는, 말보다 행동이다.
그녀가 눈을 크게 뜨며 짐이 무거워서 죄송하다고, 고맙다고 말한다. 조금 무겁긴 했다. 그렇다고 미안해 할 건 없는데. 나는 이런 일을 하라고 돈을 받는 사람이니까.
"궁금하신 게 있으시면 질문하세요."
넓지도 않은데 이층 침대가 네 개나 있어 여유 공간이 많지 않은 방에 그녀와 너무 가까이 서 있다. 양 옆에서 침대들이 나를 조여 오는 것 같다. 내 고개 아래 서 있는 그녀가 고개를 들어 좌우로 살짝 흔든다. 흔들리는 머리카락에서 나는 샴푸의 체리 향이 너무 가까워서 나도 모르게 숨을 참아 버렸다.
"없어요."
"그럼 편히 쉬세요."
돌아서서 문을 닫는다. 그녀가 계단을 살금살금 올라가는 소리가 작게 작게 들린다. 속도가 느리다. 역시 무서운 걸까. 이층 침대의 계단은 좁고 가파르다.
다시 데스크 안으로 들어선다. 화면 보호 상태로 바뀐 컴퓨터의 마우스를 잡고 두어 번 흔드는데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린다. 이번 손님은 진짜 금발이다. 침대는 커튼이 잘 닫히지 않는 자리로 확정이다.
이층으로 올라가는 동안 커튼에 대해 설명하며 양해를 구한다. 나보다 키가 큰 금발의 손님은 오케이라고 말하며 내 뒤를 성큼성큼 따라온다.
문을 열고 방으로 들어서며 이층의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문 열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을 테지. 씻을 준비를 하는 건지 어깨까지 오는 단발머리는 흐트러져 있고 손으로는 짐을 뒤적거리고 있다. 빨갛고 도톰한 입술은 아까부터 아주 살짝 벌어져 있다.
나는 황급히 고개를 앞으로 돌리고 다시 영어로 말하기 시작한다. 이런, 갑자기 R 발음이 잘 안 되는 것 같다. 금발의 손님은 질문이 많다. 나는 문 쪽을 힐끔거리며 열심히 대답을 한다. 갑자기 커튼이 닫힌다. 내가 힐끔거리는 걸, 봤을까.
오늘 오기로 한 손님은 다 왔다. 이제 딱히 할 건 없다. 누군가 조심조심 내려오는 소리가 들린다.
그녀가 다가와 초콜릿 과자를 내민다.
"짐이 너무 무거워서 죄송했어요."
"괜찮아요. 별거 아닌데."
"아니에요. 죄송해요."
"감사합니다."
그녀가 목례를 한 뒤 사라진다.



아침 7시 55분. 데스크의 문을 열고 컴퓨터를 켠다. 본체가 부르르 떨리며 모니터에 불이 들어온다.
손에 휴지 두 개를 들고 이층으로 올라간다. 화장실 문을 열고 휴지를 채워 넣는다. 화장실 쓰레기통은 아직 반도 차지 않았다. 방 안의 휴지통은 비워야 할까. 조심스레 문을 연다. 이층의 커튼이 열려 있다. 하얀 시트 위에는 그녀의 노란 머리카락.



저녁 7시 55분. 문이 열리며 그녀가 들어온다. 노란 머리가 살짝 젖어 있다. 소나기 예보가 있었는데, 우산을 들고 가지 않았나 보다. 나는 여느 때와 같은 인사말을 하고, 그녀는 살짝 목례를 한다.
"우산 필요하시면 저한테 말씀하세요. 구비하고 있는 게 몇 개 있으니까."
그녀가 신발을 신발장에 넣다 말고 고개를 돌린다.
"저도 우산 있어요. 오늘은 그냥."
그녀가 머리를 만지며 멋쩍게 웃는다.
물에 젖은 체리 향이 문득 가까워졌다. 붉은 입술이 열리며 무언가 소리가 튀어나온다. 갑자기 숨을 참아서인지 문득 어지럽다.
"… 옥상이 있나요?"
그녀의 분홍색 티셔츠에 간간이 찍혀 있는 붉은 얼룩.
"빨래 너시게요?"
그녀가 잠시 눈을 깜빡거린다.
"아, 그냥, 술을 좀 샀는데, 혼자 있고 싶어서."
그러고 보니 그녀의 손에 하얀 편의점 비닐 봉지가 들려 있다.
"아, 어쩌죠, 여긴 옥상은 없어요. 오래된 주택을 개조해서 만든 거라서."
갑자기 내 목소리가 크게 들린다. 데시벨을 낮춰야 하는데. 그녀는 왜 혼자 술을 마시고 싶은 걸까. 비까지 맞고서.
"저도 옥상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때가 있는데, 아, 죄송해요."
쓸데없는 말이 자꾸 입에서 튀어나온다. 데시벨은 내려가지 않는다.
"아, 네. 알겠습니다. 감사해요."
방으로 향한 그녀의 뒷모습이 머물렀던 자리를 바라본다. 한숨도 못 잔 사람처럼 자꾸 멍해진다.
시야에 갑자기 그녀가 나타난다. 눈이 마주치자 그녀가 살짝 웃어 보인다. 정신을 차리고서 나도 웃는다. 그녀는 다시 빛의 속도로, 그러나 아주 띄엄띄엄, 사라진다. 마구 자른 필름을 엉성하게 이은 것처럼 그녀의 움직임이 끊어져 보인다.
파전 냄새가 난다. 비 오는 날엔 역시 파전이다. 이런 날엔 나도 한잔 하고 싶다.
체리 맛이 날 것 같은 이상한 파전 냄새가 난다. 고개를 드니 그녀가 서 있다. 머리는 말라 있고, 옷의 붉은 얼룩도 보이지 않는다.
"파전 좀 드실래요?"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나는 것 같다.
"아, 좋죠, 파전. 근데 저 주셔도 돼요? 양이 많지 않은 것 같은데."
"저녁을 먹고 와서요."
그녀가 은박지 뭉치, 젓가락을 내게 건넨다.
"감사합니다."
손 안이 따뜻해진다.
"근데 혹시 여기 근처에 공원이 있나요?"
"아, 한 20분 정도 걸어가면 아주 큰 공원이 있는데, 호수도 있고. 근데, 음, 거긴 너무 크고 별로 안 가까워서. 음, 작은 공원도 근처에 있을 텐데, 어디였더라, 그게. 음, 아주 작은 공원이 있었던 것 같은데, 하하."
또 데시벨이 올라갔다. 헛웃음이 나온다. 그녀는 빤히 나를 보고 있다. 그녀는 작은 공원이 좋다고 말한 적이 없다. 혼자 있고 싶다고는 했지만 공원 크기와는 상관이 없다. 나는 왜 작은 공원을 떠올리려 애쓰고 있는 걸까. 그녀를 찾으러 갈 것도 아닌데.
"아, 여기서 왼쪽으로 5분쯤 가다가 주유소 있는 데서 오른쪽으로 꺾어서 10분쯤 가면 작은 공원이 있어요. 놀이터도 있고, 옆에 강도 있어요. 작긴 한데 벤치도 있고 앞에 슈퍼도 있어요. 경치도 괜찮고 있을 건 다 있으니까. 음, 거기가 좋을 것 같은데."
"아, 네. 감사해요."
허둥거리며 말하는 나를 가만히 보고 있던 그녀가 목례를 한 후 신을 신고 총총 사라진다. 흔들거리던 하얀 비닐 봉지의 잔상.
나는 자리를 뜰 수 없다. 나는 여기 있으라고 돈을 받는 사람이니까. 고개를 숙이고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싼다. 한동안, 한동안.



현관 앞에 그녀의 노란 플라스틱 캐리어가 놓여 있다. 아침을 먹은 건지 부엌에서 나오는 그녀와 스쳐지나며 인사를 했다. 밝게 인사하려고 했는데 목소리가 늘어져 버렸다. 그녀는 목소리를 내지 않고 목례를 한 후 스쳐갔다.
시간 맞춰 오느라 미처 다 말리지 못 한 머리를 말린다. 세면대 앞에 서서 드라이기를 켜고 머리에 뜨거운 바람을 쏘인다.
그녀는 조그만 가글 한 통을 들고 내 옆을 지나 세면대 끝 자리에 선다. 그녀의 볼이 부어오르고, 작고 빠르게 떨린다. 고개를 숙이고 하얀 거품을 뱉어 낸다. 그녀의 휘어진 등 위로 뻗어나가고 싶어하는 손에 힘을 주고 머리를 매만진다.
데스크로 들어가 컴퓨터를 켜는데 그녀의 목소리가 들린다.
"지금 체크 아웃 할게요. 감사했습니다."
"아, 네."
웃으면서 배웅의 말을 해야 하는데, 가라앉은 목소리의 단답밖에 나오지 않는다.
현관 앞에서 그녀가 머뭇거린다. 바닥에 신발이 너무 많다. 그녀의 캐리어가 더욱더 무거워 보인다. 그녀가 캐리어를 들어올리려 낑낑거린다. 캐리어는 들어올려지다가 아주 빠르게 내려오고 다시 들어올려지다 다시 빠르게 떨어진다.
"괜찮으세요?"
그녀는 멋쩍게 웃어 보이고서 신발에 닿지 않을만큼만 캐리어를 들어올려 밖으로 빼낸다. 손잡이를 붙잡은 어깨가 가라앉아 있다.
"조심해서 가세요."
가끔은, 행동보다 말이 필요할 때도 있지만 말다운 말이 생각나지 않는다. 내가 입을 움직이는 짧은 시간, 눈을 깜빡이며 나를 바라보는 그녀.
"감사했습니다."
내 말이 끝나자 그녀는 살짝 웃어 보이고서는 아까 했던 말을 반복한 뒤 목례를 하고 사라졌다.
나는 제대로 닫히지 않은 문을 닫는다. 문 너머에 아직 서 있을까. 내가 문 닫는 걸 봤을까. 안녕, 잘 가요.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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