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에 쓴 글.



모닝콜 소리에 눈을 떴다. 반쯤 들어오다 마는 햇살에 눈이 따갑다. 기지개를 켜며 꿈지럭거리다 리처드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의 두꺼운 책등에 머리를 찧었다.

"기도합시다."
기도손을 하고 눈을 감았다. 눈을 감으니 다른 감각들이 곤두선다. 좋은 향기가 난다. 2의 긴 머리를 휘감고 있는 체리 향 샴푸 냄새.
교회 뒤에 자리한 널찍한 마당에 다 같이 모여 국수를 먹으며 크리스마스 트리를 어떻게 꾸밀 것인가에 대해 논의했다. 크리스마스가 며칠 남지 않았다. 내 생일도 못 챙기는 주제에 남의 생일을 챙길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지만 어쨌거나.
국수를 다 먹고 그릇을 갖다 놓으러 갔는데 집사인지 장로인지 하는 아저씨가 십일조는 언제부터 낼 거냐고 묻는다.
"얘는 아직 제가 전도 중이에요."
2가 집사인지 장로인지 하는 아저씨를 향해 웃어 보이며 보이지 않게 내 등을 떠민다. 엉거주춤 움직이는 내게 2가 귓속말로 천천히 내도 된다고 속삭였다.
"천국 가면 다 돌려받는 거긴 한데, 너는 아직 안 내도 돼."
"으응, 그렇구나."
"1아, 나는 네가, 정말, 음, 정말 구원 받아서 나랑 같이 천국 갔음 좋겠어."
"아, 그래, 정말, 고마워."
'지금 당장 같이 가자고 해도 갈 수 있니?'라고, 혼자 생각만, 했다.
"십일조는 네가 정말 내고 싶을 때, 그때 내면 돼."

일요일 아르바이트까지 빼고 교회에 나가게 된 건 2의 전도 때문이었다. 아니, 전도한 2 때문이었다.
셔터를 내린 가게 안에서 나는 걸레질을 하고 2는 돈을 세고 있었다. 잘 지워지지 않는 자국이 있어 박박 걸레질을 하다 팔이 아파 눈을 감으니 체리 향 샴푸 냄새가 났다.
"너 내일 뭐해?"
종소리에 침을 질질 흘리는 파블로프의 개처럼, 2의 목소리만으로 손끝이 저려 왔다.
"내일 출근해야지."
2가 머리를 뒤로 젖히며 까르르 웃었다.
"내일부터 여름휴가잖아. 5일 동안."
나는 잠깐 멍하니 서서 이달의 날짜들을 계산했다.
"딱히 할 거 없겠네, 그럼. 너 나랑 우리 교회 갈래?"
"교회?"
난 교회도 성당도 하나님도 하느님도 좋아하지 않는다고, 그의 아들과 며느리도 좋아하지 않는다고 덧붙이고 싶었으나 2의 기분을 상하게 하고 싶지 않았기에 입을 다물었다.
나는 2의 근처로 발걸음을 옮겨 더럽지도 않은 카운터 위를 닦았다. 그녀의 포니테일에서 나는 냄새에 걸레를 쥔 손이 간질거렸다. 2의 머리카락을 만지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지만, 용서받기 힘든 충동만 느끼며 살아온 나는 저지르기보다 억누르는 데 익숙한 인간이다. 살짝 통통한 손가락으로 터치 스크린을 꾹꾹 누르며 정산을 마무리하는 2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2가 고개를 돌릴 기미가 보이자마자 다시 걸레질에 집중했다.
"1아, 나는 네가 구원 받았으면 좋겠어. 그래서 나랑 같이 천국 갔음 좋겠어."
"천국?"
그딴 게 있다고 믿는 인간들의 머릿속이 궁금하다는 말이 목구멍을 찔러 댔지만, 침을 꿀꺽 삼키며 그 말도 함께 넘겨 버렸다.
"학교에서도 여기에서도, 그냥 널 볼 때마다 그런 생각이 들었어."
"학교에서 날 봤다고?"
"늘 같은 시간에 같은 일을 하고 있으니까. 전공실 갈 때마다 자판기 청소하고 있고, 책 빌리러 갈 때마다 책 정리하고 있으니까."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이렇게 여기 서 있을 수 없으니까.
"그랬구나, 아는 척하지 그랬어."
"바빠 보여서. 널 볼 때마다 바빠 보이고, 지쳐 보여서. 그리고 나랑 아르바이트도 같이 하는데 늘 바쁘니까, 일 끝나고 같이 커피라도 마시자거나 하기도 그렇고."
돼지국밥보다 비싼 커피 같은 건, 사 마실 돈도 없어.
"아, 요즘 좀 바쁘긴 했어."
"아무튼, 그래서. 뭐랄까, 마음이 평화로워질 수 있는 곳을 알려 주고 싶어서, 그래서."
"어, 근데 나는 종교 같은 거 안 믿는데."
2의 눈망울이 흔들거리며 침을 꼴깍 삼키는 게 보였다.
"사실, 며칠 전에 네가 학생식당 구석에서 울면서 밥 먹는 걸 봤거든."
망할.
울면서 밥을 먹었던 건, 순전히 돈 때문이었다.
백반이 지긋지긋해서 뚝배기 불고기 정식을 먹고 싶었는데, 딱 100원이 모자랐다. 어제 방세를 내 버려서 통장에도 돈이 없는데, 통장 잔고를 몇 번이고 계산했지만 카드를 긁을 수 없었다. 나는 할 수 없이 백반을 주문했는데, 하얀 주방모자를 쓴 아주머니가 '달걀후라이 소진'이라고 적힌 종이를 백반 받는 곳 앞에 붙이고 있었다.
하루 한 번 먹는 식사인데 100원이 모자라 제일 싼 메뉴를 먹어야 하고, 시간을 못 맞춰 달걀도 못 먹게 됐다는 사실에 갑자기 머리가 뜨거워지며 눈물이 왈칵 솟았다. 콧물을 훌쩍거리며 휴지를 몇 장 뽑아 식당 제일 구석으로 향했다. 조용히 콧물을 닦으며 밥을 먹었다. 한 숟가락 퍼 넣을 때마다 눈물이 한 방울씩 흘러내렸다. 콧물을 닦았던 휴지를 조심스레 접어 눈물도 닦았다.
머릿속으로 빠르게 영상이 재생되며 얼굴이 화끈거렸다. 나는 다시 고개를 숙이고 걸레질에 집중했다. 2가 계산대 서랍을 밀어넣는 소리가 들렸다.
"다음부턴 혼자 밥 먹지 말고 나랑 같이 먹자."
"어, 시간이 맞으면, 그러자."
"내일 딱히 할 거 없으면 교회도 같이 갔으면 좋겠는데."
"아, 근데 좀, 피곤해서."
"종일 있는 거 아니고 그냥 아침 예배만 같이 보고 가면 괜찮지 않을까? 난 네가 정말 구원 받아서 행복해졌음 좋겠어."
그리고 벌써 반년째, 나는 2와 함께 교회에 다니고 있다. 자신을 믿어야만 천국에 들어올 수 있게 해 준다는 치사하고 이기적인 신을 내가 믿게 될 리 없지만.
내가 믿는 건 2에게서 나는 향기, 그녀의 솜털 같은 목소리와 속삭이는 발걸음 소리 같은 것들.
"자, 옆 사람과 손을 잡고, 함께 노래 부릅시다."
언제나 나를 자기 옆에 앉히는 2의 손을 잡고 노래를 부른다. 몇 번을 불러도 가사가 외워지지 않는 노래를 열심히 부른다. 2의 손가락 사이사이를 꼼지락거리고 싶다는 충동이 일 때마다 눈을 꼭 감고 더 크게 노래를 부른다. 당연하게도, 가사를 틀린다. 내가 가사를 틀릴 때마다 2는 노래를 부르다 말고 까르르 웃는다.
교회 앞마당에 세워진 커다란 트리가 나를 내려다본다. 어두운 밤하늘로 치솟은 커다란 금색 별 하나.
"크리스마스 예배도 같이 올 거지?"
나를 올려다보는 2의 새까맣고 촉촉한 눈동자를 보면, 뭐든 그녀가 하자는 대로 맞춰 주고 싶어진다. 그렇지만 그녀가 나를 먹여살려 줄 건 아니니까.
"그날은 일해야 해. 전날에도 일해야 하고."
2는 개강 후 아르바이트를 관뒀다.
"크리스마스 즈음에는 다른 애들이 다 일하기 싫다고 해서, 사장도 일하기 싫다고 하고. 원래 사장이 아침조잖아. 그때부터 마감까지 쭉 하면 시급 더 쳐 준다고 하더라고."
"같이 열심히 준비했는데, 트리도 꾸미고 선물도 만들고."
"그래도 일해야 하니까, 어쩔 수 없어."
2는 시무룩해질 때면 오른쪽 볼에 바람을 넣는다. 잘 부푼 풍선껌 같다. 콕 찔러 터트려 버리고 싶다.
"다른 사람들이랑 재밌게 놀아. 나도 일 끝나고 시간 봐서 연락하든가 할게."
교회 앞에서 헤어진다. 2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는데 2가 고개를 돌려 손을 흔든다. 나도 손을 흔들고, 뒤돌아선다.
이틀치 일당을 평소보다 더 쳐 준다고 해도, 십일조를 낼 돈 같은 건 없다. 장학금을 받아도, 아르바이트를 해도, 보증금 없는 옥탑방에 살아도, 하루에 한끼만 먹어도 왜인지 늘 돈이 부족하다. 다시 고시원에 들어가야 하나. 고시원에 들어간다 해도 아낄 수 있는 건 전기세, 물세 정도다. 맛없는 밥과 김치만 먹는 생활을 반복하면 밥값도 아낄 수 있겠지만.

휴대전화를 켰다. 잠에 찌든 근시안은 큰 숫자밖에 읽지 못한다. 오전 8시라는 건지 오후 8시라는 건지 모르겠다. 눈을 쓱쓱 비비고 다시 화면을 들여다봤다. 오후 8시다. 오전 아르바이트 후 나도 모르게 잠들어 버렸는데, 5시간이나 자 버렸다. 또 밤새겠군, 작게 중얼거리며 기지개를 켰다. 아야, 나도 모르게 소리가 튀어나왔다. 문에 부딪힌 손등이 아팠다.
문고리를 돌려 밀고 부엌으로 향했다. 더러운 물컵들 중 하나를 골라 한 번 씻어 물을 받았다. 방으로 돌아가 조용히 물을 마시려는데 벽이 미세하게 흔들거렸다. 작게, 작게, 더 작게, 억누르는 신음과 함께 방이 움직였다. 물을 머금고 바닥에 누워 꼴꼴거리며 물을 넘겼다. 컵이 더러워서인지 물맛이 더러웠다.
부엌에 물컵을 갖다 놓고 오다 옆 방에서 나오는 남자와 마주쳤다. 몸을 돌려 비켜 줬다. 여성 전용 고시원인데, 간혹 남자들과 마주친다. 그가 목발을 짚고 쿵쿵거릴 때마다 헝클어진 머리카락이 고시원 벽과 함께 흔들렸다. 남자는 나가다 말고 총무 아저씨와 인사를 했다.
징검다리처럼 뚝뚝 떨어진 기억들 사이로 남자의 모습이 오락가락하며 필름이 되감기다 멈췄다. 오늘 새벽 6시께 편의점에서 콘돔을 사 갔던 남자다. 목발을 짚고 와서 콤돔을 두 개 사 갔다.
나머지 하나는 언제 쓸까, 문득 궁금해졌다.
고시원에 대한 기억은, 이런 것들. 과제 파일 사이에 끼어 죽어 있던 개미떼, 갈라진 타일 바닥, 더러운 녹색 물컵, 누런 찌꺼기들이 들러붙어 있던 밥-수입 쌀로 지은, 옥상에서 빨래를 널 때 가끔 마주쳤던 이름 모를 여자들, 복도와 계단에서 스쳐지나간 그녀의 남자들.
그리고 계단 옆에 놓여 있던 스펀지가 튀어나온 소파에 앉아 담배를 피웠던 기억 따위. 옥상 문틈으로 새 나오는 햇빛이 담배를 든 손가락 끝을 환하게 만들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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