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치지 않을 편지



ㄱ이라고 쓰다 만다

그 하고 썼다 지운다

너는 무엇을 하고 썼다 지운다

너는 지금쯤 어디에서 하고 썼다 지운다

네가 잘 지내기를 하고 썼다 지운다

너에게 다가가고 싶지만 하고 썼다 지운다

보고 싶다고 썼다 지운다

' > 운문' 카테고리의 다른 글

비빔면  (0) 2023.05.21
한밤중  (0) 2023.05.20
주파수 잡기  (0) 2023.05.19
옆집 개(누군가의 인생)  (0) 2023.05.19
보통 사람의 휴일  (0) 2023.05.19

번역 (2020.3.22.)

원문 출처: https://www.aozora.gr.jp/cards/000035/files/42376_15545.html

太宰治 葉桜と魔笛

www.aozora.gr.jp



『새잎 돋은 벚나무와 요술피리(葉桜と魔笛)』
ー다자이 오사무(太宰治)

 벚꽃이 지고, 이렇듯 푸른 잎 돋아나는 시기가 되면, 저는, 늘 떠올립니다. ――라고, 그 노부인은 이야기한다. ――지금으로부터 35년 전, 아버지는 그 무렵 아직 살아 계시어서, 저의 일가족, 이라 하여도, 어머니는 그로부터 7년 전, 제가 13살이었을 때, 이미 타계하시어, 그 뒤로는, 아버지와, 저와 여동생과 셋이서 가정을 이루고 있었습니다만, 아버지는, 저 열여덟, 여동생 열여섯이었을 때에, 시마네현(島根県)의 일본해(역자 주: 일본에서 볼 적에...)를 낀 인구 2만 남짓한 어느 성 아랫마을에, 중학교 교장으로서 부임해, 마땅한 셋집도 없었던 터라, 마을에서 떨어진, 금방이라도 산에 다다를 듯한, 약간 떨어진 곳에 외로이 서 있는 절의, 떨어진 손님방, 두 개를 빌려, 거기에, 쭉, 여섯 해째에 마츠에(松江)의 중학교로 전임할 때까지, 살고 있었습니다. 제가 결혼한 것은, 마츠에에 오고 나서의 일로, 스물넷의 가을이었으니까, 당시로서는 꽤 늦은 결혼이었습니다. 일찍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아버지는 완고한 교육자 기질이라, 세속의 일에는, 아예, 깜깜하여, 제가 없어지고 나면, 온 집안 살림이, 온통 엉망진창이 될 것이, 불 보듯 뻔하였기에, 저도, 그 전까지 혼사에 대한 이야기가 차고 넘쳤었지만, 집을 버리면서까지, 시집살이를 하러 갈 기분은 들지 않았던 것입니다. 하다 못해, 여동생이라도 건강했었더라면, 저도, 조금은 마음이 가벼웠겠습니다만, 여동생은, 저와 달리, 무척이나 아름답고, 머리도 길고, 참으로 잘생긴, 어여쁜 아이였습니다만, 몸이 약하여, 그 성 아랫마을에 와서, 두 해째의 봄, 저 스물, 여동생 열여덟에, 여동생은, 죽었습니다. 그 무렵의, 이것은, 이야기입니다. 여동생은, 이미, 꽤 오래 전부터, 가망이 없었습니다. 신장 결핵이라고 하는, 나쁜 병에 걸리어, 알아차렸을 때에는, 양쪽의 신장이, 벌써 망가질 대로 망가져 있었기에, 의사도, 백일 이내, 라고 딱 잘라 아버지에게 말했습니다. 어떻게 하여도, 손쓸 수가 없는 지경인 것이라 합니다. 한 달 지나, 두 달 지나, 어느덧 백일째가 가까워졌어도, 우리는 그저 묵묵히 지켜보고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여동생은, 아무것도 모르는 채, 의외로 생기 있게, 종일 침대에 누운 채이긴 합니다만, 그렇다 하여도, 밝게 노래를 부르거나, 농담을 하거나, 제게 응석을 부리거나, 이런 것이 이제 삼사십일 지나면, 죽어 버리는 것이다, 확실히, 그리 정해져 있는 것이다, 생각하니, 가슴이 미어져, 온몸을 바늘로 찌르는 듯이 고통스러워, 저는, 미쳐 버릴 것만 같습니다. 삼월, 사월, 오월, 그렇습니다. 오월의 한가운데, 저는, 그날을 잊을 수 없습니다.
 들도 산도 신록으로, 알몸이 되어 버리고 싶을 만큼 따뜻하여, 저에게는, 신록이 눈부시어, 눈이 따끔따끔 아려와, 혼자, 이런저런 생각에 잠기어 허리끈 사이에 양손을 가만히 찔러 넣고서, 고개를 숙이고 들길을 걸으며, 생각, 또 생각, 이것도 저것도 모두 괴로운 일투성이여서 숨이 안 쉬어질 만큼, 저는, 몸부림치며 걸었습니다. 도옹, 도옹, 하고 봄날의 흙의 밑에서 밑에서부터, 마치 극락정토에서부터 울려퍼져 오는 듯이, 어렴풋한, 그렇지만, 두려워질 만큼 광대한, 마치 지옥의 저 끝에서 커다랗고 커다란 큰 북이라도 두들겨 울리고 있는 듯한, 무시무시한 소리가, 쉴 새 없이 울려퍼져 와, 저에게는, 그 공포스러운 소리가, 대체 무엇인지, 알 수 없어, 정말 이미 내가 미쳐 버린 게 아닌가, 생각하여, 그대로, 몸이 뻣뻣이 굳어 움츠러들어, 돌연 와앗! 하고 큰 소리가 나와, 서 있질 못하고 콰당 들판에 주저앉아, 무엇도 생각할 겨를도 없이 울음을 터뜨려 버렸습니다.
 나중에 안 일입니다만, 그 무섭고 괴상한 소리는, 대마도 해전(역자 주: 다자이 오사무의 단편이나 에세이를 읽다 보면 다자이 오사무가 일제의 사상에 그저 순응하는 '순진무구한 백성'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드는데, 몇몇 작품이 번역되지 않은 게 그 때문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군함의 대포 소리였다고 합니다. 토우고우(東郷. 역자 주: 일본어 표기법에 따른 표기는 '도고'이나, 외국어 원음에 가깝게 표기 및 발음 가능한 한글과 한국어를 두고 왜 희한한 규칙을 만들어 사용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기에 그냥 저렇게 표기. 한국인은 청음, 발음 시 맨 앞에 오는 예사소리를 거센소리와 구분하지 못하기에 그렇다고 하는데 내 주변인들은 다 구분하고 있음) 제독의 명령 아래, 러시아 제국의 발트 함대를 일거에 격멸하시기(역자 주: '하기'가 아니라 '하시기'라는 의미의 존댓말을 쓰고 있다. 역시 이런 이유로 번역이 안 된 게 아닌가 싶다. 이 작품 전체적으로 존댓말을 과도하게 많이 쓰고 있기는 하지만) 위한, 대격전의 절정이었던 것입니다. 딱, 그즈음인 것이지요. 해군 기념일은, 올해도, 다시, 슬슬 다가옵니다. 저 해안의 성 아랫마을에도, 대포 소리가, 온몸이 오그라들 만치 들려와서, 마을 사람들도, 생기가 없었던 것입니다만, 저는, 그런 것이라고는 모른 채, 그저 온통 여동생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차, 반미치광이 상태였던 것으로, 뭔가 불길한 지옥의 큰 북인 것만 같은 기분이 들어, 오랫동안 들판에서, 얼굴도 들지 않고 그저 울고만 있었습니다. 날이 저물어 왔을 무렵, 저는 겨우 일어서서, 죽은 듯이, 멍하니 절에 돌아왔습니다.
 "언니." 하고 여동생이 부르고 있습니다. 여동생도, 그 무렵은, 수척해져서, 힘없이, 스스로도, 희미하게나마, 이제 그렇게 길지 않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있는 모양으로, 이전처럼, 괜히 뭐라뭐라 저에게 트집 잡아 심술 부리거나 응석 부리는 등의 일이, 없어져 버려서, 저에게는, 그것이 또 하나 그리도 괴로운 일인 것입니다.
 "언니, 이 편지, 언제 온 거야?"
 저는, 흠칫, 양심이 찔려, 얼굴의 핏기가 사라진 것을 스스로도 명확히 의식하였습니다.
 "언제 온 거야?" 여동생은, 무심한 듯합니다. 저는, 마음을 가다듬고,
 "방금 전에. 당신이 주무시고 계시던 동안에. 너, 웃으면서 자고 있던걸. 나, 슬쩍 네 베갯머리에 놓아 뒀었어. 몰랐지?"
 "아, 응, 몰랐어." 여동생은, 땅거미가 내려앉은 어두침침한 방 안에서, 희게 아름답게 웃으며, "언니, 나, 이 편지 읽었어. 이상하네. 내가 모르는 사람이야."
 모를 리가 있나. 저는, 그 편지를 보낸 M・T라고 하는 남자를 알고 있습니다. 아주 잘 알고 있었던 겁니다. 아뇨, 만난 적은 없는 것입니다만, 제가, 그로부터 5, 6일 전, 여동생의 장롱을 조용히 정리하여, 그 상자에, 하나의 서랍의 가장 깊숙한 곳에, 한 다발의 편지가, 녹색 리본으로 꽉 묶여 숨겨져 있는 것을 발견하여, 해서는 안 되는 일인 것입니다만, 리본을 풀어, 봐 버린 것입니다. 대강 삼십 통 정도의 편지, 모두가 그 M・T 씨한테서 온 편지였던 것입니다. 단지 편지의 겉면에는, M・T 씨의 이름은 적혀 있지 않은 채. 편지 속에 제대로 적혀 있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편지의 겉면에는, 보낸 이로서 이런저런 여성의 이름이 기입돼 있어, 그것이 죄다, 실재하는, 여동생의 친구의 이름이었던 것으로, 저도 아버지도, 이렇게 한가득 남자와 편지를 주고받고 있을 줄은, 꿈에도 알아차리지 못했던 것입니다.
 분명, 그 M・T라고 하는 이는, 주의 깊게, 여동생에게서 친구의 이름을 잔뜩 알아 두고서, 차례차례 그 수많은 이름을 써서 편지를 부치고 있었던 것이겠지요. 저는, 그리 생각을 굳히고, 젊은이들의 대담함에, 숨죽여 혀를 내두르며, 그 엄격한 아버지에게 발각되면, 어찌 될 것인가, 몸서리 칠 만큼 두려워져, 그렇지만, 한 통씩 날짜순으로 읽어 나가면서, 저마저, 왠지 즐거워서 마음이 들떠 와, 두근거림은, 뜻밖의 타인의 연애사에, 혼자서 킥킥 웃어 버려서, 끝무렵에는 저 자신에게마저, 넓고 큰 세계가 펼쳐져 오는 듯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저는, 아직 그 무렵은 갓 스물이 되었을 뿐으로, 젊은 여자로서 차마 입에 올리지 못하는 괴로움도, 이래저래 있었던 것입니다. 삼십 통 남짓의, 그 편지를, 마치 계곡물이 쏟아져 흐르는 듯한 느낌으로, 쭉쭉 읽어 내려가, 작년 가을의, 마지막 한 통의 편지를, 읽다 말고, 문득 일어서 버렸습니다. 번개를 맞은 듯한 느낌, 그런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뒤로 자빠질 정도로, 흠칫 하였습니다. 여동생의 연애는, 마음만의 연애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더욱 망측하게 벌어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저는, 편지를 태웠습니다. 한 통 남기지 않고 태웠습니다. M・T는, 저 성 아랫마을에 사는, 가난한 가인(歌人)인 모양으로, 비겁하기로는, 여동생의 병세를 앎과 더불어, 여동생을 버리어, 이제 서로 잊어 버립시다, 따위 잔혹한 말을 아무렇지 않게 그 편지에도 써 두어, 그것으로, 한 통의 편지도 부치지 않는 듯한 상황이었던 것이기에, 이것은, 나만 입 다물고 평생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으면, 여동생은, 순결한 소녀인 채 죽어 간다. 누구도, 모르는 것이다, 하고 저는 고통을 가슴 속에 억눌러, 그렇지만, 그 사실을 알아 버리고 나서는, 더욱더 여동생이 가여워, 이런저런 해괴한 공상도 하며, 저 자신, 가슴이 욱신거릴 듯한, 새큼달큼한, 그것은, 께름칙하고 애달픈 감정으로, 이 같은 괴로움은, 나이를 먹을 만큼 먹은 여자가 아니면, 깨닫지 못하는, 생지옥인 것입니다. 마치, 제가 저 스스로, 그런 쓰라림과 마주한 게 아닌가 싶을 만큼, 저는, 홀로 괴로워하고 있었습니다. 그 즈음은, 저 스스로도, 정말로, 조금, 이상했던 것입니다.
 "언니, 읽어 줘. 뭔 일인지, 나는, 조금도 모르겠어."
 저는, 여동생의 부정직함을 진심으로 얄밉게 여겼습니다.
 "읽어도 괜찮아?" 그리 작은 목소리로 물어, 여동생에게서 편지를 받아든 제 손끝은, 당혹스러울 만치 떨리고 있었습니다. 펼쳐서 읽을 것까지도 없이, 저는, 이 편지의 문구를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덤덤한 얼굴로 그것을 읽어야만 합니다. 편지에는, 이렇게 쓰여 있는 것입니다. 저는, 편지를 제대로 보지도 않고, 소리 높여 읽었습니다.

 ――오늘은, 당신에게 용서를 구합니다. 제가 오늘까지, 꾹꾹 참으며 당신에게 편지를 바치지 않았던 까닭은, 모두 제가 자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저는, 가난하고, 무능합니다. 당신 하나를, 어떻게 해 주는 것도 안 되는 것입니다. 그저 말로써, 그 말에는, 한치도 거짓이 없는 것입니다만, 단지 말로써, 당신을 향한 사랑을 증명하는 것 말고는, 무엇 하나 할 수 없는 저 자신의 무력이, 싫어진 것입니다. 당신을, 하루도, 아니 꿈에서조차, 잊은 적은 없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저는, 당신을, 어찌 해 주는 것도 되지 않는다. 이것이, 괴로움에, 저는, 당신과, 헤어지자 생각했던 것입니다. 당신의 불행이 커지면 커질수록, 그리하여 저의 애정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저는 당신에게 다가갈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아시겠습니까. 저는, 결코, 당신을 속이려 하는 게 아닙니다. 저는, 그것을 스스로가 정의 내린 책임감에서 나온 것이라 여기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제 착각. 저는, 결단코 잘못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용서를 빕니다. 저는, 당신에게 있어 완벽한 사람이 되고자, 욕심을 부리고 있었던 것뿐이었습니다. 우리들, 외로이 무력하기에, 달리 무엇도 할 수 없기에, 적어도 말만이라도, 성심성의껏 전하는 것이, 참된, 겸손한 아름다운 삶의 자세일지니, 하고 저는 이제 비로소 믿고 있습니다. 언제나, 스스로 가능한 범위 내에서, 그것을 이루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좋아. 민들레꽃 한 송이 건네는 것이라도, 결코 부끄러워 않고 내미는 것이, 가장 용기 있는, 사나이다운 태도라고 믿습니다. 저는, 더이상 도망치지 않겠습니다. 저는, 당신을 사랑하고 있습니다. 매일, 매일, 노래를 지어 바치겠습니다. 그로부터, 매일, 매일, 당신의 정원의 울타리 밖에서, 휘파람 불어, 들려 드리겠습니다. 내일 밤 여섯 시가 되면, 즉시 휘파람, 군함 마치 불어 드리겠습니다. 저는 휘파람을, 무척 잘 붑니다. 지금 여기, 그것만이, 제 힘으로, 그저 가능한 일입니다. 웃으시면, 안 됩니다. 아니, 웃어 주십시오. 건강하십시오. 신은, 반드시 어딘가에서 보고 있습니다. 저는, 그것을 믿고 있습니다. 당신도, 저도, 모두 신이 어여삐 여기시는 존재입니다. 틀림없이, 아름답게 맺어질 수 있습니다.
 
 기다림 끝에 올해도 피어나는 복숭아 꽃잎 희다 하는 와중에 꽃은 붉어져 가네
 (待ち待ちて ことし咲きけり 桃の花 白と聞きつつ 花は紅なり)
 저는 배우고 있습니다. 모든 것은, 잘 되어가고 있습니다. 그럼, 내일, 다시. M・T.

 "언니, 나 알고 있어." 여동생은, 맑은 목소리로 그리 읊조리어, "고마워, 언니, 이거, 언니가 쓴 거지."
 저는, 부끄러운 나머지, 그 편지, 천 갈래 만 갈래로 찢어발기고, 제 머리카락을 마구 헝클어 쥐어뜯고 싶었습니다. 앉지도 서지도 못하고, 라는 건 이런 마음을 가리켜 하는 말이겠지요. 내가 쓴 것이다. 여동생의 고통을 눈뜨고 보지 못하여, 제가, 이제부터 매일, M・T의 필적을 흉내 내어, 여동생이 죽는 날까지, 편지를 써, 서투른 시(和歌)를, 고심하여 지어, 그리하여 밤 여섯 시면, 몰래 담장 밖으로 나가, 휘파람 불리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부끄러웠다. 어줍은 노래 같은 것까지 써서, 무척이나 부끄러웠습니다. 몸뚱아리도 삶도, 딴생각으로, 저는, 곧장은 대답도, 할 수 없었습니다.
 "언니, 걱정 안 해도, 괜찮아." 여동생은, 이상하리 만치 침착히, 숭고할 정도로 아름답게 미소 짓고 있었습니다. "언니, 그 녹색 리본으로 묶어 놓은 편지를 본 거지? 그건, 거짓말. 나, 너무 외로워서, 재작년 가을부터, 혼자서 그런 편지 써서, 나한테 오게끔 우체통에 넣고 있었어. 언니, 바보 같다고 생각하면 안 돼. 청춘이라고 하는 건, 꽤 소중한 거야. 나, 병에 걸리고 나서, 그걸, 확실히 알게 되었어. 혼자서, 자기 앞으로 편지 따위 적는다는 게, 추잡스러워. 한심하다. 멍청이다. 나는, 진짜로 남자랑, 대담하게 놀았으면, 좋았을 텐데. 내 몸을, 꽉 안기고 싶었어. 언니, 나는 지금껏 단 한 번도, 연인은 커녕, 외간 남자랑 얘기조차 해 본 적이 없었어. 언니도, 그렇지. 언니, 우리들 잘못하고 있었어. 빈틈이 너무 없어. 하아, 죽는다는 거, 싫어. 내 손이, 손끝이, 머리칼이, 가여워. 죽는다니, 싫어. 싫어."
 저는, 슬프기도 하면서, 두렵기도 하면서, 기쁘기도 하면서, 부끄럽기도 하면서, 가슴이 메어와, 뭐가 뭔지 알 수 없게 되어 버려, 여동생의 여윈 뺨에, 제 뺨을 꼭 눌러 맞대어, 그저 어느새 눈물이 흘러내려 와, 가만히 여동생을 안아 주었습니다. 그때, 아아, 들려오는 것입니다. 낮고 희미하게, 그러나, 확실히, 군함 마치의 휘파람입니다. 여동생도, 귀를 기울였습니다. 아아, 시계를 보니 여섯 시인 것입니다. 우리들, 이루 말할 수 없는 공포에, 억세게 억세게 끌어안은 채, 미동도 않은 채, 저 정원의 푸른 잎새 돋은 벚나무의 저 깊은 곳에서부터 들려오는 이상야릇한 마치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습니다.
 신은, 있다. 반드시, 있다. 저는, 그것을 믿었습니다. 여동생은, 그로부터 사흘째 되던 날 죽었습니다. 의사는,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습니다. 너무나도 조용히, 일찍 숨을 거둬 버렸기 때문이겠지요. 그렇지만, 나는, 그 순간 놀라지 않았다. 모든 게 신의, 뜻이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지금은, ――나이 들어, 이런저런 물욕이 생겨나, 부끄럽습니다. 신앙이건 뭐건 조금 희미해져 온 것이겠습니다만, 그 휘파람도, 어쩌면, 아버지가 벌이신 일은 아니었을까 하고, 뭐랄까 그런 의심을 품는 일도 있습니다. 학교 일을 마치고 돌아오신 뒤, 옆방에서, 서서 우리의 이야기를 들으시고는, 측은히 여기시어, 엄혹한 아버지로서는 일생일대의 연극을 하신 건 아니었을까, 하고 생각하는 일도, 있습니다만, 설마, 그럴 리는 없겠지요. 아버지가 살아 계셨더라면, 여쭤 볼 수도 있겠습니다만,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벌써, 이러니저러니 15년째가 된 것입니다. 아니, 역시 신의 자비겠지요.
 저는, 그리 믿어 안심하고 싶은 것이겠습니다만, 어쩐지, 나이를 먹을수록, 물욕이 일어, 신앙도 옅어져 와, 이래서는 안 되겠다 싶습니다.

번역 (2019.8.12.)

에세이 '가난은 어디로 간 걸까' ㅡ 무라카미 하루키.
원제: '貧乏はどこに行ったのか?' - "村上朝日堂 はいほー!" 중에서


자랑할 건 못 되지만, 나는 예전에 꽤 가난했던 적이 있다. 갓 결혼했을 무렵으로, 우리는 가구도 아무것도 없는 방에서 조용히 살고 있었다. 난로조차 없어서, 추운 밤에는 고양이를 껴안아 온기를 얻었다. 고양이도 추우니까 필사적으로 인간에게 매달려 있었다. 이쯤 되면 이제 공생 같은 것이다. 거리를 걷다가 목이 말라도 찻집에라고는 들어간 적도 없었다. 여행도 한 적이 없었고, 옷도 사지 않았다. 그저 그냥 움직이고 있었다. 그러나 그로 인해 불행하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돈이 있었으면은 하고 물론 생각이야 했지만, 없는 건 없는 거니까 뭐 어쩔 수 없지 여기고 있었다. 어쩔 도리도 없이 돈에 쪼들려 아내와 둘이서 밤중에 그저 머리를 떨구고 길을 걷다가 만 엔 지폐를 세 장 주운 적이 있었다. 나쁘다고 생각은 했지만, 파출소에 갖다주지 않고 그 돈으로 빚을 갚았다. 인생도 버린 게 아닌가, 하고 그때 생각했다. 우리는 젊어서, 세상 물정을 거의 몰라서, 그리고 서로 사랑하고 있어서, 가난 따위 전혀 두렵지 않았다. 대학을 나왔지만, 취직 따위 하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여 그저 좋을 대로 살고 있었다. 객관적으로 보면 사회에서 벗어나 있었던 것이지만, 불안이라고 할 만한 것도 없었다.
그럼에도 뭐, 어쨌거나 가난했다.
그 시절의 이야기를 하자면 끝이 없다. 그런 일도 있었지, 이런 것도 했지, 하고 이야기가 밑도 끝도 없이 쏟아져 나온다. 이른바 가난 자랑이라는 것이다. 옛날에는 사람이 모이면 다들 이런 류의 가난 자랑을 했다. 누군가가 자기가 전에(혹은 지금) 얼마만치 가난했는지(한지) 하는 이야기를 한다. 그러면 다른 누군가가 "농담 아니야, 그런 건 가난 축에도 못 끼어" 하고 말을 꺼낸다. "나 같은 놈은, 일주일 동안 고양이 사료를 먹고 살았다고"라나 뭐라나. 이건 나 개인이 놓여 있던 환경의 특이성일지도 모르겠으나, 내 주변에는 가난한 인간이 한가득 있었다. 그들은 농담이 아니라 정말로 가난했다. 코바야시 군은 먹을 게 없어서, 표고버섯의 심을 그릇 가득 먹고서 배를 앓았다. 제대로 된 인간은 그런 걸 먹지 않는다. 호리우치 군도 무진장 가난했다. 언제나 속을 비워서 비틀비틀 비틀거리며 걸어다녔다. 얼마 전까지(고작 4, 5년 전까지) 내 주변에는 차를 갖고 있는 인간이라고는 거의 없었다. 있었다고 해도 엄청나게 오래된 세 모델 전의 카로라(*토요타 자동차의 차 모델명. 우리나라 현대 소나타 정도인 듯)라든가, 지저분한 라이트에스(*토요타 자동차의 차 모델명. 우리나라 기아 카니발 정도인 듯)라든가, 그 정도의 차밖에 갖고 있지 않았다. 그리고 그러한 것이 당연하다는 듯 우리는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어느 틈엔가 모두들 기이하게도 가난하지 않게 되어 버렸다. 내 주변에는 벤츠를 갖고 있는 인간이 몇 명인가 있다. BMW를 갖고 있는 인간도 있고, 볼보를 갖고 있는 인간도 있다. 내 주변에 부자인 지인이 늘어난 것은 아니다. 옛날부터 알고 지내던 인간이 모두들 어쩌다 보니 가난하지 않게 되어 버린 것이다.
이건 뭐 나이에 따른 것이겠지. 모두들 나이를 먹어서, 어쩌다 그리 돼 버린 것이라고. 하지만 그와 더불어 세상의 풍조라는 것도 꽤 큰 요소가 아니었을까 하고 나는 생각한다. 정리하자면, 세상이 가난이라고 하는 것을 그다지 쳐주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다. 가난이라고 하는 것이 그저 돈이 없는 비참한 상황으로서밖에 여겨지지 않게 되어 버렸다. 그러니까 가난 자랑 따위 이제는 전혀 의미를 갖지 않게 되어 버린 것이다.
가끔 젊은 여자들과 만나서 얘기하면ㅡ변명하려는 건 아니지만, 정말로 가끔입니다ㅡ 그녀들은 딱 잘라 가난해지고 싶지 않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건 "희망"이 아니라, "신념 표명"이다. 상당히 딱 잘라서. "가난이 싫은 건가?"라고 내가 물으면, "완전 싫어"라고 말한다. "무라카미 씨는 옛날에 가난했었나요?"라고 물어와서, "그래요"라고 말하면, 그녀들은 대체로 꽤나 곤란한 표정을 짓는다. 그녀들에게는 가난이라고 하는 상황이 제대로 구체적으로 상상되지 않는 것이다. 상상할 수 없으니까 돌연 곤란해지는 것이다. 젊은 여자들을 곤란하게 해서는 나도 역시 난감해지니까, 그 시점에서 나는 서둘러 화제를 바꿔 버린다. 실수로도 가난 자랑 따위 입에 올리지 않는다. 그런 걸 얘기해 봤자 그저 언짢은 분위기가 될 뿐이다.
가난은 도대체 어디로 가 버린 걸까? 하고 나는 때때로 생각한다.
이런 이야기를 하면 정말로 늙은이 냄새가 난다고 여겨질 것 같고, 미움받을 것이라고 생각되지만, 옛날의(20년 전의 *이 책이 출간된 게 1989년이므로 여기서 20년 전이라 함은 1969년 혹은 그 이전) 여자들은 "가난 따위 절대 싫어"라고는 그다지 입에 담지 않았다. 적어도 내 주변에 있던 여자들은 그랬다. 그녀들은 돈보다는 일단 납득 가능한 삶을 살고 싶다고 하는 것이 우선이었던 것 같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실제로 그런 삶을 사는 여자가 많았다. 물론 그렇지 않은 여자도 한가득 있었다. 외제차를 모는 남자가 아니면 데이트 하지 않는다고 하는 여자도 있기는 했다. 하지만 그런 경우는 어디까지나 소수여서, 적어도 나와는 그다지 상관이 없었다. 내 주변에 있던 보통 여자들은 차가 없어도 돈이 없어도 그런 건 신경도 쓰지 않았다. 내게 돈이 없다면, 데이트를 해도 상대방이 돈을 내 주었다. 그런 건 부끄러움도 무엇도 아니었다. 우리가 바라고 있었던 것은 좀더 다른 것이었다. 물론 그 누구도 기꺼이 가난해지고 싶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것은 예의 통과의례이지 않은가 여기는 정도로 우리는 마음을 접은 채 생각하고 있었던 게 아닌가 한다. 그리고 실제로 그랬다. 실제로ㅡ이런 걸 쓰는 것이 무척 부끄럽지만ㅡ 가난은 참으로 즐거웠다. 여름의 오지게 더운 오후에 머리가 멍해져 찻집에 들어가 냉방을 쐬며 아이스 커피를 마시고 싶어도, 아내와 둘이서 "참자"라며 견디어 겨우겨우 집에 돌아와 보리차를 벌컥벌컥 마신다…… 그것은 그 나름대로 무척 즐거웠다. 그것은 지난 일이니까 즐겁다고 말하는 게 아니다. 그것은 돈과는 상관없는 것이다. 그것은 말하자면 상상력의 문제다. 상상력이라고 하는 것이 있으면, 우리는 대부분의 일을 헤쳐나갈 수 있다. 예컨대 부자로 있든지 거렁뱅이로 있든지.
가난은 도대체 어디로 가 버린 걸까? 가난은 사라져 버린 걸까?
일요일 아침에 집 근처를 산책하고 있으면, U 네크라인 셔츠에 축 처진 버뮤다 반바지, 고무 비치 샌들 차림의 아버님이 아파트 주차장에서 처량할만치 하얀 벤츠를 세차하고 있는 광경을 볼 수 있다. 그런 걸 보면 나는 "어이, 아재, 거 퍽 없어 보이네"라고 생각한다. "그건 당신 개인적인 편견 아니야?"라고 아내는 말하지만서도.

- 끝 -

[단편소설] 노란 캐리어
(2013~2014년쯤 쓴)


끼이익 소리를 내며 한 여자가 들어선다. 좁은 현관에 발을 디디고 서 있는 모습이 왠지 아슬아슬해 보인다. 신발을 벗고 고개를 들자마자 목례를 한 후 이름을 말하는 그녀.
꽉 찬 신발장을 위아래로 훑더니 신발장 위에 신발을 올려놓는다.
"예약 확인 부탁드립니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더니 다시 고개를 돌려 등에 멘 배낭에서 주섬주섬 종이 한 장을 꺼낸다. 나는 종이를 복사한 후 그녀에게 돌려주었다. 정말 일부러 그런 건 아니지만, 원래대로 손바닥만하게 접은 종이를 돌려줄 때 그녀의 손등을 살짝 만져 버렸다. 내 손가락 위에 그녀의 손등, 그녀의 손바닥 위로 내가 올린 종이 한 장, 그 위로 파르르 떨리는 내 손가락.
숙소를 안내하기 위해 안내 데스크에서 나와 그녀의 옆에 선다. 노란 머리 색깔과 똑같은 노란 캐리어를 든 손이 힘겨워 보인다.
나는 남자답게, 가볍지 않은 그녀의 캐리어를 가볍게 들어 방까지 안내한다. 그녀는 작은 목소리로 고맙다고 말하며 내 뒤를 졸졸 쫓아온다. 나는 그녀가 잘 따라오고 있는지 슬쩍 고개를 돌려 확인한다.
오래된 주택을 개조해 만든 2층짜리 게스트하우스의 계단은 조금만 힘을 줘 걸어도 삐걱 소리가 난다. 여성용 공동 침실 안에는 이층 침대 네 개가 있다. 지금 남은 자리는 두 곳. 하나는 아래층이라 편하지만 머리맡 쪽의 커튼이 제대로 닫히지 않는다. 하나는 넓지만 문 바로 앞이고 이층이라 계단을 오르내리기가 약간 무서울지도 모른다.
"어느 쪽이 좋으세요?"
내 설명을 제대로 듣고는 있는 건지 두리번거리던 그녀가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어느 쪽이든 괜찮다고 말한다.
"그럼 여기로 할게요. 1번 자리예요."
'네-' 그녀의 작은 목소리가 귓가에 웅웅거린다.
"여긴 문 앞이라 캐리어를 놓기가 좀 그런데 다른 분 침대 앞에 같이 두실래요, 아님 침대 위에 놓으실래요? 공간은 있으니까."
그녀가 다시 두리번거리며 입술을 살짝 뗐다 깨물었다 뗐다 깨물었다 한다.
"가까운 데가 좋아요, 떨어진 데도 괜찮아요?"
그녀가 살짝 미간을 찌푸린다.
"아, 짐이 너무 무거워서 위에 올리기는-"
나는 그녀의 말을 듣다 말고 남자답게 캐리어를 번쩍 들어 이층 침대 위에 올린다. 남자는, 말보다 행동이다.
그녀가 눈을 크게 뜨며 짐이 무거워서 죄송하다고, 고맙다고 말한다. 조금 무겁긴 했다. 그렇다고 미안해 할 건 없는데. 나는 이런 일을 하라고 돈을 받는 사람이니까.
"궁금하신 게 있으시면 질문하세요."
넓지도 않은데 이층 침대가 네 개나 있어 여유 공간이 많지 않은 방에 그녀와 너무 가까이 서 있다. 양 옆에서 침대들이 나를 조여 오는 것 같다. 내 고개 아래 서 있는 그녀가 고개를 들어 좌우로 살짝 흔든다. 흔들리는 머리카락에서 나는 샴푸의 체리 향이 너무 가까워서 나도 모르게 숨을 참아 버렸다.
"없어요."
"그럼 편히 쉬세요."
돌아서서 문을 닫는다. 그녀가 계단을 살금살금 올라가는 소리가 작게 작게 들린다. 속도가 느리다. 역시 무서운 걸까. 이층 침대의 계단은 좁고 가파르다.
다시 데스크 안으로 들어선다. 화면 보호 상태로 바뀐 컴퓨터의 마우스를 잡고 두어 번 흔드는데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린다. 이번 손님은 진짜 금발이다. 침대는 커튼이 잘 닫히지 않는 자리로 확정이다.
이층으로 올라가는 동안 커튼에 대해 설명하며 양해를 구한다. 나보다 키가 큰 금발의 손님은 오케이라고 말하며 내 뒤를 성큼성큼 따라온다.
문을 열고 방으로 들어서며 이층의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문 열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을 테지. 씻을 준비를 하는 건지 어깨까지 오는 단발머리는 흐트러져 있고 손으로는 짐을 뒤적거리고 있다. 빨갛고 도톰한 입술은 아까부터 아주 살짝 벌어져 있다.
나는 황급히 고개를 앞으로 돌리고 다시 영어로 말하기 시작한다. 이런, 갑자기 R 발음이 잘 안 되는 것 같다. 금발의 손님은 질문이 많다. 나는 문 쪽을 힐끔거리며 열심히 대답을 한다. 갑자기 커튼이 닫힌다. 내가 힐끔거리는 걸, 봤을까.
오늘 오기로 한 손님은 다 왔다. 이제 딱히 할 건 없다. 누군가 조심조심 내려오는 소리가 들린다.
그녀가 다가와 초콜릿 과자를 내민다.
"짐이 너무 무거워서 죄송했어요."
"괜찮아요. 별거 아닌데."
"아니에요. 죄송해요."
"감사합니다."
그녀가 목례를 한 뒤 사라진다.



아침 7시 55분. 데스크의 문을 열고 컴퓨터를 켠다. 본체가 부르르 떨리며 모니터에 불이 들어온다.
손에 휴지 두 개를 들고 이층으로 올라간다. 화장실 문을 열고 휴지를 채워 넣는다. 화장실 쓰레기통은 아직 반도 차지 않았다. 방 안의 휴지통은 비워야 할까. 조심스레 문을 연다. 이층의 커튼이 열려 있다. 하얀 시트 위에는 그녀의 노란 머리카락.



저녁 7시 55분. 문이 열리며 그녀가 들어온다. 노란 머리가 살짝 젖어 있다. 소나기 예보가 있었는데, 우산을 들고 가지 않았나 보다. 나는 여느 때와 같은 인사말을 하고, 그녀는 살짝 목례를 한다.
"우산 필요하시면 저한테 말씀하세요. 구비하고 있는 게 몇 개 있으니까."
그녀가 신발을 신발장에 넣다 말고 고개를 돌린다.
"저도 우산 있어요. 오늘은 그냥."
그녀가 머리를 만지며 멋쩍게 웃는다.
물에 젖은 체리 향이 문득 가까워졌다. 붉은 입술이 열리며 무언가 소리가 튀어나온다. 갑자기 숨을 참아서인지 문득 어지럽다.
"… 옥상이 있나요?"
그녀의 분홍색 티셔츠에 간간이 찍혀 있는 붉은 얼룩.
"빨래 너시게요?"
그녀가 잠시 눈을 깜빡거린다.
"아, 그냥, 술을 좀 샀는데, 혼자 있고 싶어서."
그러고 보니 그녀의 손에 하얀 편의점 비닐 봉지가 들려 있다.
"아, 어쩌죠, 여긴 옥상은 없어요. 오래된 주택을 개조해서 만든 거라서."
갑자기 내 목소리가 크게 들린다. 데시벨을 낮춰야 하는데. 그녀는 왜 혼자 술을 마시고 싶은 걸까. 비까지 맞고서.
"저도 옥상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때가 있는데, 아, 죄송해요."
쓸데없는 말이 자꾸 입에서 튀어나온다. 데시벨은 내려가지 않는다.
"아, 네. 알겠습니다. 감사해요."
방으로 향한 그녀의 뒷모습이 머물렀던 자리를 바라본다. 한숨도 못 잔 사람처럼 자꾸 멍해진다.
시야에 갑자기 그녀가 나타난다. 눈이 마주치자 그녀가 살짝 웃어 보인다. 정신을 차리고서 나도 웃는다. 그녀는 다시 빛의 속도로, 그러나 아주 띄엄띄엄, 사라진다. 마구 자른 필름을 엉성하게 이은 것처럼 그녀의 움직임이 끊어져 보인다.
파전 냄새가 난다. 비 오는 날엔 역시 파전이다. 이런 날엔 나도 한잔 하고 싶다.
체리 맛이 날 것 같은 이상한 파전 냄새가 난다. 고개를 드니 그녀가 서 있다. 머리는 말라 있고, 옷의 붉은 얼룩도 보이지 않는다.
"파전 좀 드실래요?"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나는 것 같다.
"아, 좋죠, 파전. 근데 저 주셔도 돼요? 양이 많지 않은 것 같은데."
"저녁을 먹고 와서요."
그녀가 은박지 뭉치, 젓가락을 내게 건넨다.
"감사합니다."
손 안이 따뜻해진다.
"근데 혹시 여기 근처에 공원이 있나요?"
"아, 한 20분 정도 걸어가면 아주 큰 공원이 있는데, 호수도 있고. 근데, 음, 거긴 너무 크고 별로 안 가까워서. 음, 작은 공원도 근처에 있을 텐데, 어디였더라, 그게. 음, 아주 작은 공원이 있었던 것 같은데, 하하."
또 데시벨이 올라갔다. 헛웃음이 나온다. 그녀는 빤히 나를 보고 있다. 그녀는 작은 공원이 좋다고 말한 적이 없다. 혼자 있고 싶다고는 했지만 공원 크기와는 상관이 없다. 나는 왜 작은 공원을 떠올리려 애쓰고 있는 걸까. 그녀를 찾으러 갈 것도 아닌데.
"아, 여기서 왼쪽으로 5분쯤 가다가 주유소 있는 데서 오른쪽으로 꺾어서 10분쯤 가면 작은 공원이 있어요. 놀이터도 있고, 옆에 강도 있어요. 작긴 한데 벤치도 있고 앞에 슈퍼도 있어요. 경치도 괜찮고 있을 건 다 있으니까. 음, 거기가 좋을 것 같은데."
"아, 네. 감사해요."
허둥거리며 말하는 나를 가만히 보고 있던 그녀가 목례를 한 후 신을 신고 총총 사라진다. 흔들거리던 하얀 비닐 봉지의 잔상.
나는 자리를 뜰 수 없다. 나는 여기 있으라고 돈을 받는 사람이니까. 고개를 숙이고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싼다. 한동안, 한동안.



현관 앞에 그녀의 노란 플라스틱 캐리어가 놓여 있다. 아침을 먹은 건지 부엌에서 나오는 그녀와 스쳐지나며 인사를 했다. 밝게 인사하려고 했는데 목소리가 늘어져 버렸다. 그녀는 목소리를 내지 않고 목례를 한 후 스쳐갔다.
시간 맞춰 오느라 미처 다 말리지 못 한 머리를 말린다. 세면대 앞에 서서 드라이기를 켜고 머리에 뜨거운 바람을 쏘인다.
그녀는 조그만 가글 한 통을 들고 내 옆을 지나 세면대 끝 자리에 선다. 그녀의 볼이 부어오르고, 작고 빠르게 떨린다. 고개를 숙이고 하얀 거품을 뱉어 낸다. 그녀의 휘어진 등 위로 뻗어나가고 싶어하는 손에 힘을 주고 머리를 매만진다.
데스크로 들어가 컴퓨터를 켜는데 그녀의 목소리가 들린다.
"지금 체크 아웃 할게요. 감사했습니다."
"아, 네."
웃으면서 배웅의 말을 해야 하는데, 가라앉은 목소리의 단답밖에 나오지 않는다.
현관 앞에서 그녀가 머뭇거린다. 바닥에 신발이 너무 많다. 그녀의 캐리어가 더욱더 무거워 보인다. 그녀가 캐리어를 들어올리려 낑낑거린다. 캐리어는 들어올려지다가 아주 빠르게 내려오고 다시 들어올려지다 다시 빠르게 떨어진다.
"괜찮으세요?"
그녀는 멋쩍게 웃어 보이고서 신발에 닿지 않을만큼만 캐리어를 들어올려 밖으로 빼낸다. 손잡이를 붙잡은 어깨가 가라앉아 있다.
"조심해서 가세요."
가끔은, 행동보다 말이 필요할 때도 있지만 말다운 말이 생각나지 않는다. 내가 입을 움직이는 짧은 시간, 눈을 깜빡이며 나를 바라보는 그녀.
"감사했습니다."
내 말이 끝나자 그녀는 살짝 웃어 보이고서는 아까 했던 말을 반복한 뒤 목례를 하고 사라졌다.
나는 제대로 닫히지 않은 문을 닫는다. 문 너머에 아직 서 있을까. 내가 문 닫는 걸 봤을까. 안녕, 잘 가요. 안녕.

' > 산문' 카테고리의 다른 글

[단편] 비둘기떼  (1) 2023.10.08
[단편] 옥상의 고양이  (0) 2023.10.08
[단편] 구원을 향해서  (1) 2023.10.08
[단편] 오늘 하늘  (2) 2023.06.04
[단편] LoveLoveLove  (2) 2023.05.19

[단편] LoveLoveLove
(2018년 작)


널 보고 있어도 난 그립기만 해
널 그리워하면서도 그립기만 해
너에게 닿고 싶어 난 손을 뻗지만
그 거리는 언제나 내게는 멀기만 해

―S < I miss U > 중에서

스마트폰 화면을 뚫어져라 바라본다. 거기에 내 사랑이 있다.
사랑이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을 거의 100% 확신하고 있는 상태에서 누군가를 열렬히 좋아한다는 게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사랑을 바치는 상대가 내게 차가운 눈빛으로 이별을 고한다거나 가시 돋친 말로 상처를 줄 일도 거의 100% 없을 거라는 점에서 꽤 안전한 일이기도 하다. 혼자 꿈꾸는 아름답고 안전한 사랑에 일단 길들여지면 여기에서 벗어나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나는 3년째 한 사람을 사랑하고 있다. 그 사람에게 내 사랑을 고백한 지는 이미 오래되었지만 그 사람이 그걸 기억할지는 모르겠으며, 그 사람이 내게 사랑을 말한 지도 이미 오래되었으나 그 사랑은 정확히 나만을 위한 것은 아니다.
그 사람은 늘 이렇게 말한다.
“팬 여러분, 사랑해요.”
다수에게 바치는 세레나데를 들으며 나는 기뻐한다. ‘나는 비혼주의자이지만 네가 결혼하자고 하면 지금 당장이라도 할 수 있어.’라고 생각하기도 하지만 이건 아마도, 그런 일이 생길 가능성이 거의 없기 때문일 것이다.
그에게는 그를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수만 명의 팬이 있으나 나는 부모님에게서도 그런 맹목적인 사랑이나 믿음을 받아 본 적이 없다. 나는 수만 명의 팬 중 하나일 뿐이고, 사람을 가장 빨리 판단할 수 있는 기준인 겉모습으로 평가한다고 했을 때 그 수만 명 중에서 과연 몇 등이나 할 수 있을지 가늠조차 불가능하다. 수만 명의 팬들 속에서 운 좋게 그의 눈에 띄어 정말 프러포즈를 받게 된다고 하여도, 나는 아마 내 자신이 부끄러워서 옆에 서지도 못할 것이다. 키는 177cm로 엄청 큰 키는 아니지만 얼굴이 작아 9~10등신은 족히 돼 보이는 그의 옆에 서 있는 나를 상상하기만 해도 왠지 울적해진다. 내가 그와 어울릴 만한 인물이었다면 난 그의 팬이 되는 대신 연예인 지망생이 되었을 것이다. 지금 이 상태 그대로이더라도, 내가 그와 정말 사랑에 빠지고 싶었다면 성형을 하든 지옥 다이어트를 하든 로비를 하든 뭘 하든, 어떻게든 연예인이 되려고 했을 것이다. 내가 정말로 그와 쌍방향 사랑에 빠지고 싶었더라면.

내가 좋아하는 그는 S라는 그룹의 여덟 멤버 중 한 명이다. 메인 보컬도 아니고 랩퍼도 아니고 아티스트형 싱어송라이터도 아니고 개그 담당도 아니다. 노래도 보통이고 랩도 보통이고 춤도 보통이지만 얼굴과 사랑스러움만큼은 원톱인, 그런 멤버다. 그는 예쁘고 잘생긴 얼굴과 해맑은 미소로 사랑스러움을 발산하며 수십 만의 팬카페 회원 중 수만 명을 사로잡았다.
나는 태어나기를 일편단심 민들레형으로 태어난 터라 그에게만 애정을 쏟아붓는다. 한 명만 좋아하기에도 돈과 시간이 부족한 마당에 누구를 더 좋아하겠는가.
나는 S 그룹의 공식 팬카페 회원이며 내가 가장 아끼는 멤버인 그, L의 공식 팬카페 회원이고 L의 팬페이지 운영자―전문 용어로 홈마라고 불리는―이기도 하다. 일주일에 적어도 5~6개인 공연 스케줄을 되도록 모두 보러 가서 사진 및 동영상을 찍어 올리는 것이 팬페이지 운영자로서의 내 역할이다.
언젠가 L은 모 라디오 방송에서 팬카페나 팬페이지를 둘러보는 게 취미라고 말한 적이 있는데, 가끔 자신의 SNS에 내가 찍은 사진을 올리기도 한다―한마디로 ‘불펌’이지만, L의 허락 없이 L의 사진을 찍은 것부터가 L의 모습을 불펌한 것이므로, 전문 용어로 쌤쌤(same same)이라고 할 수 있겠다. 내가 찍은 사진이 L이 만들고 L이 관리하는 공간에 올라오면 나는 수만 명―약간 허세를 부리자면―의 팬들이 나를 부러워하고 질투하는 말을 듣는다. L과 내가 꽤 친한 사이일 거라고 떠들어대는 이들도 있다. 물론 이건 사실이 아니다. L은 나를 알기는 할 테지만 내 이름, 정확히 말하자면 내 닉네임만을 알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알려져 있지만 익명의 존재나 다름없다.

유월의 어느 화요일 밤, 여기는 어느 대학교 광장이다. 민주광장이라고 하는데 민주주의와는 아무 관련이 없어 보이는 행사와 사람들로 채워져 있다. 아니, 이렇게 다양한 사람들이 자유롭게 뭔가를 즐길 수 있다는 게 민주주의인가. 그렇다면 여기는 민주주의로 꽉 찬, 그야말로 민주적인 민주광장이다. 아무튼, 나는 S 그룹, 정확히 말하자면 L을 기다리고 있다. 커다란 렌즈를 단 커다란 카메라를 든 채 대학교 축제가 열리고 있는 여기에 서 있다.
S 그룹을 보러 온 듯한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교복을 입은 사람도 있고, 플래카드를 든 사람도 있고, 나처럼 카메라를 짊어진 사람도 있다. 그들은 기다림에 몰두하느라 축제의 민주광장 속에서 축제를 즐기지 않기에 눈에 띈다.
시끄러운 축제의 소리 속에 간간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섞여 들린다. 교복 입고 여긴 왜 왔냐, 저 나이 먹고 가수 쫓아다니고 싶을까, 카메라 비싸 보인다, 돈 많으니까 일은 안 하고 저러고 다니겠지 등등.
10대는 공부는 안 하고 뭐하는 짓이냐는 소리를 듣고, 10대를 넘어서면 애도 아닌 게 뭐하는 짓이냐는 소리를 듣는 게 팬질―팬으로서 하는 모든 일을 흔히 팬질이라고 하는데 좀 더 비하하는 말로는 빠순질이라는 용어가 있다―의 세계다. 그러니까 팬질은, 언제 해도 좋은 소리 듣는 건 힘든 일이라는 것이다.

< 팬질의 단계 >
1단계: 유튜브나 텔레비전 등 방송 보며 좋아하기―이건 보통 시청자들도 하는 일 아닌가 싶을 수도 있지만 수많은 영상을 찾아보며 즐기는 것도 애정이 없으면 할 수 없는 일이다.
2단계: 연예인 SNS나 팬 블로그, 커뮤니티 등을 방문해 ‘눈팅’하기―‘눈팅’은 참여하지 않고 눈으로 보기만 하는 행위를 지칭하는 용어로, 본디 채팅방에서 생겨난 말이나 지금은 두루두루 쓰이고 있다.
3단계: 공식 팬카페나 팬클럽 등에 가입해 공식 팬 되기―누구누구의 팬덤 소속이라는 소속감이 솟아오른다.
4단계: CD, DVD나 음원 등 아티스트의 예술품을 비롯해 기타 굿즈 구입하기―유튜브에서 광고를 시청함으로써 에둘러 돈을 지불하는 방식이 아니라 직접적으로 ‘자기 돈’을 썼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여기까지 오고 나면 발을 빼기가 쉽지 않다.
5단계: 소속사에서 공지한 스케줄에 맞춰 실제로 보러 다니기―돈에다가 시간까지 들어갔다. 학교나 직장을 빠지기 위해 거짓말을 하게 될 수도 있다. 거짓말까지 하면서 보러 간다는 건 일상의 평온이나 양심의 가책보다 ‘내 아티스트’를 눈으로 영접하는 게 더 중요해졌다는 증거다.
6단계: 비공식 스케줄까지 쫓아다니기―이쯤 되면 자기 생활보다 아티스트 영접이 더 중요해진 것으로 보인다. 나는 5단계에서 멈췄으므로 6단계 이후의 심정은 느껴 본 적이 없기에 그저 추측해 볼 뿐이다.
7단계: 사생활까지 쫓아다니기―스토커라고도 불리는 사생팬이 된 것이다. 자기는 없고 아티스트를 보러 다니는 존재만 남게 된 것으로 보인다.

―By LoveLoveLove 홈마 3Love. ―팬질의 단계를 정리해 보았다. 어디까지나 주관적인 것임을 밝혀 둔다.

보통은 5단계부터 ‘빠순이’라는 말을 듣게 된다. 빠순이라는 말을 처음 들으면 기분이 나쁘지만―집창촌에서 생겨난 말이라는, 용어의 유래까지 어디서 듣게 되면 더더욱― 계속 듣다 보면 익숙해져서 스스로 자신을 빠순이라 칭하게 되기도 한다―이런 게 가스라이팅일까?―.
나는 스토커는 아니고 그냥 ‘빠’이다. L은 팬질 5단계까지의 팬들만 팬으로 인정한다고 모 매체와의 인터뷰를 통해 밝힌 바 있다. 허허실실하며 해맑은 미소를 ‘뿜뿜’하는 L의 모습을 떠올려 보면 “사생팬도 팬이니까 감사하다.”라고 말해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은데, 단호해야 할 때는 단호하다고 할 수 있다―이런 카리스마에 내가 또 반한다. 나는 L에게서 미움받으면서까지 L에게 다가가고 싶지는 않다. L이 내 실체를 알게 되는 것도 원하지 않는다. L이 개인인 날 보는 순간 난 부서져 버릴지도 모른다. L이 실재하는 나를 알 수 없기 때문에, L에게 나는 군중으로서 존재하기 때문에 나는 L을 사랑한다.

무료했던 한낮, 무가지의 연예면에서 L의 존재를 알게 됐었다. 여덟 명이나 되는 남자아이들이 얼굴을 모으고 찍은 사진 속에서 L이 눈에 띄었던 이유는 단지 머리카락이 아주 붉었기 때문이었다. 새빨간 머리만큼 붉었던 입술, 그것들과 대비됐던 새하얀 얼굴. 별 생각 없이 무가지를 훑어본 뒤 나는 그것을 버렸다. 내가 L을 잊지 않게 됐던 건 무가지 때문이 아니었다. 무가지를 버린 지 10분도 채 지나지 않아 나는 L을 실제로 보았다. 아직 신인이어서였는지 L은 아무렇지 않게 지하철을 기다리고 있었다. 새빨간 머리와 잘생긴 얼굴, 탁월한 패션 감각이 지나가던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지만 아무도 그가 L이라는 사실은 모르는 것 같았다. 나는 어디에서 많이 본 것 같다고 생각하며 L을 쳐다보다 L과 눈이 마주쳤고, 순간 무가지에서 봤던 L과 내 앞에 있던 L이 겹쳐졌다. L은 너무나도 하얘서 반짝반짝 빛이 났고, 새빨간 머리카락과 입술은 금방이라도 터져서 피가 흘러넘칠 것만 같았다. L은 이내 내게서 시선을 거뒀지만―길거리에서 자신을 쳐다보는 모르는 사람들이 어디 한둘이었겠는가!― 나는 하얗고 빨간 L을 쳐다보다 지하철을 놓쳤다. 지하철 유리문 너머에 있던 L의 모습이 빠른 속도로 멀어져 갔다. 붉은 흔적만이 내 눈동자 속에서 날 어지럽혔다.
나는 다시 무가지를 가지러 갔고, L이 속한 그룹명 등을 확인한 뒤 곧장 CD를 사러 갔다. CD가 눈에 띄는 자리에 있지 않아 찾는 데 약간 시간이 걸렸다. 그리 힘 있는 소속사는 아닌 모양이었다. 데뷔작인 싱글 음반은 총 아홉 종류였다. 나는 재킷 표지에 멤버 전원의 사진이 실린 것 한 장, L의 사진이 실린 것 한 장, 총 두 장을 골랐다. 한정 수량이라는 포스터는 아직 꽤 남아 있었다.
서랍장을 뒤져 오랜만에 은색 SONY CDP를 꺼내 CD를 들었다. 처음에는 어떤 게 L의 목소리인지 알 수 없었으나 L의 사진이 표지인 CD에 L의 솔로곡이 들어 있었다. L의 목소리에서는 창백하면서도 따스한 느낌이 났다.

눈을 감으면 너의 모습이 보여서
손을 뻗으면 꼭 닿을 것만 같아서
눈을 뜨면 네가 사라질까 두려워
눈을 뜰 수 없어 눈을 뜰 수 없어
눈을 감은 채 그저 어둠 속을 헤매
눈을 감은 채 허공으로 손을 뻗어
널 찾아 헤매 널 그리며 눈을 감아

―L < Where R U > 중에서

팬들의 괴성이 이어졌다. L이 손을 들어 보이고는 무대 밑으로 내려갔다. 몇몇 사람들은 수많은 사람들 틈을 비집고서 S 그룹 멤버들이 가는 방향으로 뛰어갔다. 나는 여느 때처럼 그냥 잠시 가만히 서 있었다. 축제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팬들이 빠져나간 자리는 이내 다른 사람들로 채워졌다. 세상에는 사람이라는 존재가 많고도 많아서 빈 자리가 금세 채워지고 떠난 사람이 쉬이 잊혀진다. L도 나도 이 점은 마찬가지다. 그래도 누군가의 기억에서 생존할 가능성이 더 높은 사람은 당연히 L이다. 내가 그를 기억할 것이고, L에게는 그를 추앙하는 수많은 팬들이 있으니까.
나는, 나를 기억해 줄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다. 팬페이지 LoveLoveLove 홈마 3Love로만 내 존재를 인지하고 있을 L이 날 기억해 줄까? L이 날 기억한다 해도 그건 현실의 내가 아니라 그저 홈마 3Love라는 아바타를 기억하는 것일 테다. 수많은 팬페이지 중 하나인 LoveLoveLove에 들어올 팬들도 마찬가지다. 그들에게 나는 어느 개인이 아니라, 홈마이다.

사랑한다 소리치고
내 곁에서 사라진 너
날 보면서 웃었던 너
날 보면서 울었던 너

어쩜 그렇게 가볍게
어쩜 그렇게 차갑게
떠나가는 건 한순간

그래도 즐거웠어 나
그래도 고마웠어 나
내가 널 기억할게
내가 널 사랑할게

―S < I remember U > 중에서

캄캄한 밤 외로이 도로를 질주하는 심야고속버스 속에서 L의 목소리가 담긴 노래를 들었다. 불과 2~3시간 전에 보았던 사람인데 지금은 닿을 수 없는 거리에 있다. 말할 수도 만질 수도 없는 사람을 맹목적으로 쫓는 나는 왜 이러고 있는 걸까. 생각하고 생각하면서 L의 사진과 영상이 담긴 DSLR 카메라를 꺼내 L의 모습을 돌려 본다. 작은 액정 속에 담긴 L은 이미 지나 버린 시간이다. 지나간 사람이다. 사진을 보며 눈으로는 울고 입으로는 웃고 있는 나. 화면이 흐려진다. L을 바라보다 돌아오는 길에는, 바라만 보다 돌아오는 길에는 늘 눈물이 난다. 굵은 물방울이 뚝뚝 떨어져 내린다. 보고 또 봐도 나는 외롭다. 보지 않으면 아프다. 아픈 것보다는 외로운 게 낫다고 생각한다. 지금은. 지금의 나는.

급히 화장실에만 다녀온 뒤 방바닥에 퍼질러 앉아 노트북을 켰다. 카메라를 연결한다. 몇 시간 전에 찍은 L의 모습들을 불러오고 정리한다. 흔들린 사진도 지우지 않는다. 언제나 내 곁에 있을 수 없는 L의 1분 1초가 내게는 소중하다.
잘 나온 사진들을 추려 보정 작업을 했다. 몸짓 하나하나가 우아한 L의 모습에 경탄하며 작업을 하고 사진과 영상을 LoveLoveLove에 올렸다. L이 멋지면 멋질수록, 아름다우면 아름다울수록 나는 L에게 찬사를 보내고 그 찬사의 무게에 비례해 나는 짓눌린다.
덧글이 달리길 기다리며 샤워를 했다. 거울 속 내 모습이 내 머릿속 L의 모습과 비교돼 비참해졌다. 이게 현실이라고, 수건으로 내 비루한 덩어리를 닦으며 생각했다.

<< L군, 오늘 진짜 멋있었어! 또 보고 싶다. ―Lomantic
<< ㅠㅠx100000000000000000 ―IinLinS
<< 홈마님 너무 감사해요!!! 직접 못 봐서 늘 아쉬운데, 귀염 뿜뿜 우리 L, 늘 예쁘게 예쁘게 찍어 주셔서 감사해요!!! ―L바보
<< 하앍하앍 //-// ―19L순이
<< 자기 전에 잘생긴 우리 오빠 봐서 너무 좋아요. 감사합니다! ―중L병

스크롤을 내리며 덧글들을 훑어본다. L만을 좋아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단지 자신이 좋아하는 것들 중 하나가 L인 사람들도 있다. 어느 쪽이든, 그들에게 L이란 삶의 따분함을 달래 주는 게임 같은 게 아닐까. 캐릭터를 바꿔 가며 즐길 수 있는 게임, 게임 자체가 질리면 지우고 다른 게임을 할 수도 있는 게임. 마음 한구석에 늘 빈 자리가 있고, 그게 너무 공허해서 누군가를 앉혀 놔야만 하는 것. L 대신 다른 누군가가 그 빈 자리에 들어와도 그들 삶에는 별 지장이 없을 것 같은 것. 나를 비롯해.
허무한 짓이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나의 눈은 L을 보고 황홀해 하고 나의 귀는 L을 듣고 녹아 내린다. 내 이부자리 위 천장에 붙여 놓은 L의 포스터를 보며 잠드는 나는 꿈속에서도 L을 볼 수 있기를 기대한다.

눈을 감은 채 그저 어둠 속을 헤매
눈을 감은 채 허공으로 손을 뻗어
널 찾아 헤매 널 그리며 눈을 감아

―L < Where R U > 중에서

* 본 소설에 나오는 단체, 인물, 가사 등은 모두 작자의 창작이며, 혹여 실재하는 무엇과 비슷한 정황이 있더라도 관련이 없는 허구임을 알려 드립니다.

' > 산문' 카테고리의 다른 글

[단편] 비둘기떼  (1) 2023.10.08
[단편] 옥상의 고양이  (0) 2023.10.08
[단편] 구원을 향해서  (1) 2023.10.08
[단편] 오늘 하늘  (2) 2023.06.04
[단편] 노란 캐리어  (0) 2023.05.19

주파수 잡기


아픈 눈을 뜨면 지지직
라디오 주파수 잡는 소리가 들려요
눈꺼풀에서도 지지직 소리가 나는 것만 같아
희미한 아침 햇살에 따끔거려요

이마 안쪽 벽을 타고 지지직
지난 밤 꾸다 만 꿈이 흘러가요
잡고 싶기도 하고 버리고 싶기도 한
신나고 괴상한
왼쪽 가슴 저 밑을 닳고 닳은 손톱 끝으로 간지럽히는
온전히 눈을 뜨면 날아가 버리는
저 먼 세상에 살고 있는 또 다른 내 모습은 아니었을까
그리워져 서글퍼지는 꿈

내 귀는 끊임없이 주파수를 잡아요
잡아도 잡아도 잡히지 않는

매일 밤 눈을 감으면 같은 곳
눈을 뜨면 사라지는
뿌연 잔상 위로
시리고 뜨거운 것이 주르륵
흘러내려서 두 볼에 말라붙어요

그곳의 나도
이곳의 나를 희미함으로 만나며
이유도 모르면서
눈물을 흘리지는 않을까

꿈속의 내게는 이 글을 쓰는 내가 꿈이고
나의 하루를 매일 밤 지켜보며
눈을 뜨면 사무치는 슬픔으로
가슴 한쪽을 부여잡고 울까요?

심장을 만질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아프고 간지러운 내 심장을 토닥토닥
어루만질 수 있다면
나는 늘 애꿎은
왼쪽 가슴을 쿵쿵 두들겨요

아파
아프지만

' > 운문'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한밤중  (0) 2023.05.20
부치지 않을 편지  (0) 2023.05.20
옆집 개(누군가의 인생)  (0) 2023.05.19
보통 사람의 휴일  (0) 2023.05.19
한낮의 침묵  (0) 2023.04.26


옆집 개(누군가의 인생)


그르륵 그르르르륵 그륵
옆집 개가 뭔가를 긁어대고 있다
사지를 쭉 뻗으면 신장이 사람과 비슷할 듯한 옆집 개는
뒤뜰이라고 하기가 민망한 시멘트 바닥 위에서 맴맴 돌거나 낮잠을 자거나 가끔 울거나

옆집 아저씨는 한낮에 개를 자꾸 때린다
때리면서 밥을 준다
아무나 보고 짖지 말라면서 때린다
아저씨보다 이빨이 튼튼할 옆집 개는 낑낑거리기만 한다

옆집 아줌마는 한밤중에 개를 때린다
뭐라뭐라 소리를 지르면서 때린다

나는 그저 잠을 청하며 가만히 듣고 있다

옆집 개는 제 몸의 10배는 겨우 되려나 싶은 시멘트 바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시멘트 바닥의 끝에도 미치지 못하는 줄에 매여서

가끔 옆집 개와 눈이 마주치면
녀석은 그 까만 눈동자로 나를 아주 빤히 쳐다보고
그럼 나는 괜스레 미안한 마음이 들어 고개를 돌리고



몇 년 전 쓴 시

' > 운문' 카테고리의 다른 글

부치지 않을 편지  (0) 2023.05.20
주파수 잡기  (0) 2023.05.19
보통 사람의 휴일  (0) 2023.05.19
한낮의 침묵  (0) 2023.04.26
올해 쓴 시들. Dear my muse.  (0) 2023.04.25

보통 사람의 휴일


아침에 일어나 세수하고
뒹굴거리며 책을 읽고
물을 마시고
햇살에 눈을 비비며 낮잠을 조금 자고

나른한 배를 쥐어잡고
구토를 한다

이 빌어먹을 세상
하면서 뉴스를 본다

동네 놀이터에 나가 타지도 않을
놀이기구들 사이를 걷다
집으로 돌아오는 사이에 해가
저 멀리로 사라진다

별들이 사라진다
사라지지도 않는다

밤은 컴컴하지도
컴컴하지 않지도 않다

풀벌레 소리 대신 술 취한 사람들의
술주정 소리



2023.4.23.

' > 운문' 카테고리의 다른 글

부치지 않을 편지  (0) 2023.05.20
주파수 잡기  (0) 2023.05.19
옆집 개(누군가의 인생)  (0) 2023.05.19
한낮의 침묵  (0) 2023.04.26
올해 쓴 시들. Dear my muse.  (0) 2023.04.25

RM 씨 인스타 스토리 캡처


RM 씨 인스타 스토리에 올라온 한용운 님의 「고적한 밤」에 대한 답시



「한낮의 침묵」


한낮의 그늘은 침묵한다
그늘의 담배 연기는 침전한다
구름 속으로

눈을 감고 올려다보는 하늘은 암흑이다
스삭스삭 한낮의 침묵 소리
나뭇가지와 나뭇잎이 맞부딪히는 소리
너와 내가 마음과 마음으로 맞부딪히는
한낮의 침묵 소리

침묵에서도 소리가 난다
너와 나의 마음이 울려 소리가 난다

먼 산 너머 마음에서 메아리가 다가온다
저 산 너머 구름에 실려 메아리가 가까이 다가온다

내가 보내는 대답은 파아란 하늘에 퍼져
너에게로 다가갈 것이다
나는 너의 대답을
한낮의 침묵 속에서
기다릴 것이다

끝없는 한낮의 침묵이
침전하여 내 온몸으로 되돌아올 때까지

' > 운문' 카테고리의 다른 글

부치지 않을 편지  (0) 2023.05.20
주파수 잡기  (0) 2023.05.19
옆집 개(누군가의 인생)  (0) 2023.05.19
보통 사람의 휴일  (0) 2023.05.19
올해 쓴 시들. Dear my muse.  (0) 2023.04.25

일기장에 쓴 시들을 찍은 것.

' > 운문' 카테고리의 다른 글

부치지 않을 편지  (0) 2023.05.20
주파수 잡기  (0) 2023.05.19
옆집 개(누군가의 인생)  (0) 2023.05.19
보통 사람의 휴일  (0) 2023.05.19
한낮의 침묵  (0) 2023.04.26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