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낮의 열기도 한밤의 식어 버린 달빛도 밤 공기 속을 거닐며 나는 모두 느낄 수 있네 중요한 건 내가 지금 있는 세상보다도 내 마음이 느끼는 세상 내 마음이 그 사람 안에 있다면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다 할지라도 나는 그 사람 안에 있고 그 사람은 내 안에 살아 날 살게 한다
벚꽃이 지고, 이렇듯 푸른 잎 돋아나는 시기가 되면, 저는, 늘 떠올립니다. ――라고, 그 노부인은 이야기한다. ――지금으로부터 35년 전, 아버지는 그 무렵 아직 살아 계시어서, 저의 일가족, 이라 하여도, 어머니는 그로부터 7년 전, 제가 13살이었을 때, 이미 타계하시어, 그 뒤로는, 아버지와, 저와 여동생과 셋이서 가정을 이루고 있었습니다만, 아버지는, 저 열여덟, 여동생 열여섯이었을 때에, 시마네현(島根県)의 일본해(역자 주: 일본에서 볼 적에...)를 낀 인구 2만 남짓한 어느 성 아랫마을에, 중학교 교장으로서 부임해, 마땅한 셋집도 없었던 터라, 마을에서 떨어진, 금방이라도 산에 다다를 듯한, 약간 떨어진 곳에 외로이 서 있는 절의, 떨어진 손님방, 두 개를 빌려, 거기에, 쭉, 여섯 해째에 마츠에(松江)의 중학교로 전임할 때까지, 살고 있었습니다. 제가 결혼한 것은, 마츠에에 오고 나서의 일로, 스물넷의 가을이었으니까, 당시로서는 꽤 늦은 결혼이었습니다. 일찍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아버지는 완고한 교육자 기질이라, 세속의 일에는, 아예, 깜깜하여, 제가 없어지고 나면, 온 집안 살림이, 온통 엉망진창이 될 것이, 불 보듯 뻔하였기에, 저도, 그 전까지 혼사에 대한 이야기가 차고 넘쳤었지만, 집을 버리면서까지, 시집살이를 하러 갈 기분은 들지 않았던 것입니다. 하다 못해, 여동생이라도 건강했었더라면, 저도, 조금은 마음이 가벼웠겠습니다만, 여동생은, 저와 달리, 무척이나 아름답고, 머리도 길고, 참으로 잘생긴, 어여쁜 아이였습니다만, 몸이 약하여, 그 성 아랫마을에 와서, 두 해째의 봄, 저 스물, 여동생 열여덟에, 여동생은, 죽었습니다. 그 무렵의, 이것은, 이야기입니다. 여동생은, 이미, 꽤 오래 전부터, 가망이 없었습니다. 신장 결핵이라고 하는, 나쁜 병에 걸리어, 알아차렸을 때에는, 양쪽의 신장이, 벌써 망가질 대로 망가져 있었기에, 의사도, 백일 이내, 라고 딱 잘라 아버지에게 말했습니다. 어떻게 하여도, 손쓸 수가 없는 지경인 것이라 합니다. 한 달 지나, 두 달 지나, 어느덧 백일째가 가까워졌어도, 우리는 그저 묵묵히 지켜보고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여동생은, 아무것도 모르는 채, 의외로 생기 있게, 종일 침대에 누운 채이긴 합니다만, 그렇다 하여도, 밝게 노래를 부르거나, 농담을 하거나, 제게 응석을 부리거나, 이런 것이 이제 삼사십일 지나면, 죽어 버리는 것이다, 확실히, 그리 정해져 있는 것이다, 생각하니, 가슴이 미어져, 온몸을 바늘로 찌르는 듯이 고통스러워, 저는, 미쳐 버릴 것만 같습니다. 삼월, 사월, 오월, 그렇습니다. 오월의 한가운데, 저는, 그날을 잊을 수 없습니다. 들도 산도 신록으로, 알몸이 되어 버리고 싶을 만큼 따뜻하여, 저에게는, 신록이 눈부시어, 눈이 따끔따끔 아려와, 혼자, 이런저런 생각에 잠기어 허리끈 사이에 양손을 가만히 찔러 넣고서, 고개를 숙이고 들길을 걸으며, 생각, 또 생각, 이것도 저것도 모두 괴로운 일투성이여서 숨이 안 쉬어질 만큼, 저는, 몸부림치며 걸었습니다. 도옹, 도옹, 하고 봄날의 흙의 밑에서 밑에서부터, 마치 극락정토에서부터 울려퍼져 오는 듯이, 어렴풋한, 그렇지만, 두려워질 만큼 광대한, 마치 지옥의 저 끝에서 커다랗고 커다란 큰 북이라도 두들겨 울리고 있는 듯한, 무시무시한 소리가, 쉴 새 없이 울려퍼져 와, 저에게는, 그 공포스러운 소리가, 대체 무엇인지, 알 수 없어, 정말 이미 내가 미쳐 버린 게 아닌가, 생각하여, 그대로, 몸이 뻣뻣이 굳어 움츠러들어, 돌연 와앗! 하고 큰 소리가 나와, 서 있질 못하고 콰당 들판에 주저앉아, 무엇도 생각할 겨를도 없이 울음을 터뜨려 버렸습니다. 나중에 안 일입니다만, 그 무섭고 괴상한 소리는, 대마도 해전(역자 주: 다자이 오사무의 단편이나 에세이를 읽다 보면 다자이 오사무가 일제의 사상에 그저 순응하는 '순진무구한 백성'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드는데, 몇몇 작품이 번역되지 않은 게 그 때문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군함의 대포 소리였다고 합니다. 토우고우(東郷. 역자 주: 일본어 표기법에 따른 표기는 '도고'이나, 외국어 원음에 가깝게 표기 및 발음 가능한 한글과 한국어를 두고 왜 희한한 규칙을 만들어 사용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기에 그냥 저렇게 표기. 한국인은 청음, 발음 시 맨 앞에 오는 예사소리를 거센소리와 구분하지 못하기에 그렇다고 하는데 내 주변인들은 다 구분하고 있음) 제독의 명령 아래, 러시아 제국의 발트 함대를 일거에 격멸하시기(역자 주: '하기'가 아니라 '하시기'라는 의미의 존댓말을 쓰고 있다. 역시 이런 이유로 번역이 안 된 게 아닌가 싶다. 이 작품 전체적으로 존댓말을 과도하게 많이 쓰고 있기는 하지만) 위한, 대격전의 절정이었던 것입니다. 딱, 그즈음인 것이지요. 해군 기념일은, 올해도, 다시, 슬슬 다가옵니다. 저 해안의 성 아랫마을에도, 대포 소리가, 온몸이 오그라들 만치 들려와서, 마을 사람들도, 생기가 없었던 것입니다만, 저는, 그런 것이라고는 모른 채, 그저 온통 여동생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차, 반미치광이 상태였던 것으로, 뭔가 불길한 지옥의 큰 북인 것만 같은 기분이 들어, 오랫동안 들판에서, 얼굴도 들지 않고 그저 울고만 있었습니다. 날이 저물어 왔을 무렵, 저는 겨우 일어서서, 죽은 듯이, 멍하니 절에 돌아왔습니다. "언니." 하고 여동생이 부르고 있습니다. 여동생도, 그 무렵은, 수척해져서, 힘없이, 스스로도, 희미하게나마, 이제 그렇게 길지 않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있는 모양으로, 이전처럼, 괜히 뭐라뭐라 저에게 트집 잡아 심술 부리거나 응석 부리는 등의 일이, 없어져 버려서, 저에게는, 그것이 또 하나 그리도 괴로운 일인 것입니다. "언니, 이 편지, 언제 온 거야?" 저는, 흠칫, 양심이 찔려, 얼굴의 핏기가 사라진 것을 스스로도 명확히 의식하였습니다. "언제 온 거야?" 여동생은, 무심한 듯합니다. 저는, 마음을 가다듬고, "방금 전에. 당신이 주무시고 계시던 동안에. 너, 웃으면서 자고 있던걸. 나, 슬쩍 네 베갯머리에 놓아 뒀었어. 몰랐지?" "아, 응, 몰랐어." 여동생은, 땅거미가 내려앉은 어두침침한 방 안에서, 희게 아름답게 웃으며, "언니, 나, 이 편지 읽었어. 이상하네. 내가 모르는 사람이야." 모를 리가 있나. 저는, 그 편지를 보낸 M・T라고 하는 남자를 알고 있습니다. 아주 잘 알고 있었던 겁니다. 아뇨, 만난 적은 없는 것입니다만, 제가, 그로부터 5, 6일 전, 여동생의 장롱을 조용히 정리하여, 그 상자에, 하나의 서랍의 가장 깊숙한 곳에, 한 다발의 편지가, 녹색 리본으로 꽉 묶여 숨겨져 있는 것을 발견하여, 해서는 안 되는 일인 것입니다만, 리본을 풀어, 봐 버린 것입니다. 대강 삼십 통 정도의 편지, 모두가 그 M・T 씨한테서 온 편지였던 것입니다. 단지 편지의 겉면에는, M・T 씨의 이름은 적혀 있지 않은 채. 편지 속에 제대로 적혀 있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편지의 겉면에는, 보낸 이로서 이런저런 여성의 이름이 기입돼 있어, 그것이 죄다, 실재하는, 여동생의 친구의 이름이었던 것으로, 저도 아버지도, 이렇게 한가득 남자와 편지를 주고받고 있을 줄은, 꿈에도 알아차리지 못했던 것입니다. 분명, 그 M・T라고 하는 이는, 주의 깊게, 여동생에게서 친구의 이름을 잔뜩 알아 두고서, 차례차례 그 수많은 이름을 써서 편지를 부치고 있었던 것이겠지요. 저는, 그리 생각을 굳히고, 젊은이들의 대담함에, 숨죽여 혀를 내두르며, 그 엄격한 아버지에게 발각되면, 어찌 될 것인가, 몸서리 칠 만큼 두려워져, 그렇지만, 한 통씩 날짜순으로 읽어 나가면서, 저마저, 왠지 즐거워서 마음이 들떠 와, 두근거림은, 뜻밖의 타인의 연애사에, 혼자서 킥킥 웃어 버려서, 끝무렵에는 저 자신에게마저, 넓고 큰 세계가 펼쳐져 오는 듯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저는, 아직 그 무렵은 갓 스물이 되었을 뿐으로, 젊은 여자로서 차마 입에 올리지 못하는 괴로움도, 이래저래 있었던 것입니다. 삼십 통 남짓의, 그 편지를, 마치 계곡물이 쏟아져 흐르는 듯한 느낌으로, 쭉쭉 읽어 내려가, 작년 가을의, 마지막 한 통의 편지를, 읽다 말고, 문득 일어서 버렸습니다. 번개를 맞은 듯한 느낌, 그런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뒤로 자빠질 정도로, 흠칫 하였습니다. 여동생의 연애는, 마음만의 연애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더욱 망측하게 벌어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저는, 편지를 태웠습니다. 한 통 남기지 않고 태웠습니다. M・T는, 저 성 아랫마을에 사는, 가난한 가인(歌人)인 모양으로, 비겁하기로는, 여동생의 병세를 앎과 더불어, 여동생을 버리어, 이제 서로 잊어 버립시다, 따위 잔혹한 말을 아무렇지 않게 그 편지에도 써 두어, 그것으로, 한 통의 편지도 부치지 않는 듯한 상황이었던 것이기에, 이것은, 나만 입 다물고 평생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으면, 여동생은, 순결한 소녀인 채 죽어 간다. 누구도, 모르는 것이다, 하고 저는 고통을 가슴 속에 억눌러, 그렇지만, 그 사실을 알아 버리고 나서는, 더욱더 여동생이 가여워, 이런저런 해괴한 공상도 하며, 저 자신, 가슴이 욱신거릴 듯한, 새큼달큼한, 그것은, 께름칙하고 애달픈 감정으로, 이 같은 괴로움은, 나이를 먹을 만큼 먹은 여자가 아니면, 깨닫지 못하는, 생지옥인 것입니다. 마치, 제가 저 스스로, 그런 쓰라림과 마주한 게 아닌가 싶을 만큼, 저는, 홀로 괴로워하고 있었습니다. 그 즈음은, 저 스스로도, 정말로, 조금, 이상했던 것입니다. "언니, 읽어 줘. 뭔 일인지, 나는, 조금도 모르겠어." 저는, 여동생의 부정직함을 진심으로 얄밉게 여겼습니다. "읽어도 괜찮아?" 그리 작은 목소리로 물어, 여동생에게서 편지를 받아든 제 손끝은, 당혹스러울 만치 떨리고 있었습니다. 펼쳐서 읽을 것까지도 없이, 저는, 이 편지의 문구를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덤덤한 얼굴로 그것을 읽어야만 합니다. 편지에는, 이렇게 쓰여 있는 것입니다. 저는, 편지를 제대로 보지도 않고, 소리 높여 읽었습니다.
――오늘은, 당신에게 용서를 구합니다. 제가 오늘까지, 꾹꾹 참으며 당신에게 편지를 바치지 않았던 까닭은, 모두 제가 자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저는, 가난하고, 무능합니다. 당신 하나를, 어떻게 해 주는 것도 안 되는 것입니다. 그저 말로써, 그 말에는, 한치도 거짓이 없는 것입니다만, 단지 말로써, 당신을 향한 사랑을 증명하는 것 말고는, 무엇 하나 할 수 없는 저 자신의 무력이, 싫어진 것입니다. 당신을, 하루도, 아니 꿈에서조차, 잊은 적은 없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저는, 당신을, 어찌 해 주는 것도 되지 않는다. 이것이, 괴로움에, 저는, 당신과, 헤어지자 생각했던 것입니다. 당신의 불행이 커지면 커질수록, 그리하여 저의 애정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저는 당신에게 다가갈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아시겠습니까. 저는, 결코, 당신을 속이려 하는 게 아닙니다. 저는, 그것을 스스로가 정의 내린 책임감에서 나온 것이라 여기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제 착각. 저는, 결단코 잘못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용서를 빕니다. 저는, 당신에게 있어 완벽한 사람이 되고자, 욕심을 부리고 있었던 것뿐이었습니다. 우리들, 외로이 무력하기에, 달리 무엇도 할 수 없기에, 적어도 말만이라도, 성심성의껏 전하는 것이, 참된, 겸손한 아름다운 삶의 자세일지니, 하고 저는 이제 비로소 믿고 있습니다. 언제나, 스스로 가능한 범위 내에서, 그것을 이루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좋아. 민들레꽃 한 송이 건네는 것이라도, 결코 부끄러워 않고 내미는 것이, 가장 용기 있는, 사나이다운 태도라고 믿습니다. 저는, 더이상 도망치지 않겠습니다. 저는, 당신을 사랑하고 있습니다. 매일, 매일, 노래를 지어 바치겠습니다. 그로부터, 매일, 매일, 당신의 정원의 울타리 밖에서, 휘파람 불어, 들려 드리겠습니다. 내일 밤 여섯 시가 되면, 즉시 휘파람, 군함 마치 불어 드리겠습니다. 저는 휘파람을, 무척 잘 붑니다. 지금 여기, 그것만이, 제 힘으로, 그저 가능한 일입니다. 웃으시면, 안 됩니다. 아니, 웃어 주십시오. 건강하십시오. 신은, 반드시 어딘가에서 보고 있습니다. 저는, 그것을 믿고 있습니다. 당신도, 저도, 모두 신이 어여삐 여기시는 존재입니다. 틀림없이, 아름답게 맺어질 수 있습니다.
기다림 끝에 올해도 피어나는 복숭아 꽃잎 희다 하는 와중에 꽃은 붉어져 가네 (待ち待ちて ことし咲きけり 桃の花 白と聞きつつ 花は紅なり) 저는 배우고 있습니다. 모든 것은, 잘 되어가고 있습니다. 그럼, 내일, 다시. M・T.
"언니, 나 알고 있어." 여동생은, 맑은 목소리로 그리 읊조리어, "고마워, 언니, 이거, 언니가 쓴 거지." 저는, 부끄러운 나머지, 그 편지, 천 갈래 만 갈래로 찢어발기고, 제 머리카락을 마구 헝클어 쥐어뜯고 싶었습니다. 앉지도 서지도 못하고, 라는 건 이런 마음을 가리켜 하는 말이겠지요. 내가 쓴 것이다. 여동생의 고통을 눈뜨고 보지 못하여, 제가, 이제부터 매일, M・T의 필적을 흉내 내어, 여동생이 죽는 날까지, 편지를 써, 서투른 시(和歌)를, 고심하여 지어, 그리하여 밤 여섯 시면, 몰래 담장 밖으로 나가, 휘파람 불리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부끄러웠다. 어줍은 노래 같은 것까지 써서, 무척이나 부끄러웠습니다. 몸뚱아리도 삶도, 딴생각으로, 저는, 곧장은 대답도, 할 수 없었습니다. "언니, 걱정 안 해도, 괜찮아." 여동생은, 이상하리 만치 침착히, 숭고할 정도로 아름답게 미소 짓고 있었습니다. "언니, 그 녹색 리본으로 묶어 놓은 편지를 본 거지? 그건, 거짓말. 나, 너무 외로워서, 재작년 가을부터, 혼자서 그런 편지 써서, 나한테 오게끔 우체통에 넣고 있었어. 언니, 바보 같다고 생각하면 안 돼. 청춘이라고 하는 건, 꽤 소중한 거야. 나, 병에 걸리고 나서, 그걸, 확실히 알게 되었어. 혼자서, 자기 앞으로 편지 따위 적는다는 게, 추잡스러워. 한심하다. 멍청이다. 나는, 진짜로 남자랑, 대담하게 놀았으면, 좋았을 텐데. 내 몸을, 꽉 안기고 싶었어. 언니, 나는 지금껏 단 한 번도, 연인은 커녕, 외간 남자랑 얘기조차 해 본 적이 없었어. 언니도, 그렇지. 언니, 우리들 잘못하고 있었어. 빈틈이 너무 없어. 하아, 죽는다는 거, 싫어. 내 손이, 손끝이, 머리칼이, 가여워. 죽는다니, 싫어. 싫어." 저는, 슬프기도 하면서, 두렵기도 하면서, 기쁘기도 하면서, 부끄럽기도 하면서, 가슴이 메어와, 뭐가 뭔지 알 수 없게 되어 버려, 여동생의 여윈 뺨에, 제 뺨을 꼭 눌러 맞대어, 그저 어느새 눈물이 흘러내려 와, 가만히 여동생을 안아 주었습니다. 그때, 아아, 들려오는 것입니다. 낮고 희미하게, 그러나, 확실히, 군함 마치의 휘파람입니다. 여동생도, 귀를 기울였습니다. 아아, 시계를 보니 여섯 시인 것입니다. 우리들, 이루 말할 수 없는 공포에, 억세게 억세게 끌어안은 채, 미동도 않은 채, 저 정원의 푸른 잎새 돋은 벚나무의 저 깊은 곳에서부터 들려오는 이상야릇한 마치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습니다. 신은, 있다. 반드시, 있다. 저는, 그것을 믿었습니다. 여동생은, 그로부터 사흘째 되던 날 죽었습니다. 의사는,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습니다. 너무나도 조용히, 일찍 숨을 거둬 버렸기 때문이겠지요. 그렇지만, 나는, 그 순간 놀라지 않았다. 모든 게 신의, 뜻이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지금은, ――나이 들어, 이런저런 물욕이 생겨나, 부끄럽습니다. 신앙이건 뭐건 조금 희미해져 온 것이겠습니다만, 그 휘파람도, 어쩌면, 아버지가 벌이신 일은 아니었을까 하고, 뭐랄까 그런 의심을 품는 일도 있습니다. 학교 일을 마치고 돌아오신 뒤, 옆방에서, 서서 우리의 이야기를 들으시고는, 측은히 여기시어, 엄혹한 아버지로서는 일생일대의 연극을 하신 건 아니었을까, 하고 생각하는 일도, 있습니다만, 설마, 그럴 리는 없겠지요. 아버지가 살아 계셨더라면, 여쭤 볼 수도 있겠습니다만,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벌써, 이러니저러니 15년째가 된 것입니다. 아니, 역시 신의 자비겠지요. 저는, 그리 믿어 안심하고 싶은 것이겠습니다만, 어쩐지, 나이를 먹을수록, 물욕이 일어, 신앙도 옅어져 와, 이래서는 안 되겠다 싶습니다.
에세이 '가난은 어디로 간 걸까' ㅡ 무라카미 하루키. 원제: '貧乏はどこに行ったのか?' - "村上朝日堂 はいほー!" 중에서
자랑할 건 못 되지만, 나는 예전에 꽤 가난했던 적이 있다. 갓 결혼했을 무렵으로, 우리는 가구도 아무것도 없는 방에서 조용히 살고 있었다. 난로조차 없어서, 추운 밤에는 고양이를 껴안아 온기를 얻었다. 고양이도 추우니까 필사적으로 인간에게 매달려 있었다. 이쯤 되면 이제 공생 같은 것이다. 거리를 걷다가 목이 말라도 찻집에라고는 들어간 적도 없었다. 여행도 한 적이 없었고, 옷도 사지 않았다. 그저 그냥 움직이고 있었다. 그러나 그로 인해 불행하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돈이 있었으면은 하고 물론 생각이야 했지만, 없는 건 없는 거니까 뭐 어쩔 수 없지 여기고 있었다. 어쩔 도리도 없이 돈에 쪼들려 아내와 둘이서 밤중에 그저 머리를 떨구고 길을 걷다가 만 엔 지폐를 세 장 주운 적이 있었다. 나쁘다고 생각은 했지만, 파출소에 갖다주지 않고 그 돈으로 빚을 갚았다. 인생도 버린 게 아닌가, 하고 그때 생각했다. 우리는 젊어서, 세상 물정을 거의 몰라서, 그리고 서로 사랑하고 있어서, 가난 따위 전혀 두렵지 않았다. 대학을 나왔지만, 취직 따위 하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여 그저 좋을 대로 살고 있었다. 객관적으로 보면 사회에서 벗어나 있었던 것이지만, 불안이라고 할 만한 것도 없었다. 그럼에도 뭐, 어쨌거나 가난했다. 그 시절의 이야기를 하자면 끝이 없다. 그런 일도 있었지, 이런 것도 했지, 하고 이야기가 밑도 끝도 없이 쏟아져 나온다. 이른바 가난 자랑이라는 것이다. 옛날에는 사람이 모이면 다들 이런 류의 가난 자랑을 했다. 누군가가 자기가 전에(혹은 지금) 얼마만치 가난했는지(한지) 하는 이야기를 한다. 그러면 다른 누군가가 "농담 아니야, 그런 건 가난 축에도 못 끼어" 하고 말을 꺼낸다. "나 같은 놈은, 일주일 동안 고양이 사료를 먹고 살았다고"라나 뭐라나. 이건 나 개인이 놓여 있던 환경의 특이성일지도 모르겠으나, 내 주변에는 가난한 인간이 한가득 있었다. 그들은 농담이 아니라 정말로 가난했다. 코바야시 군은 먹을 게 없어서, 표고버섯의 심을 그릇 가득 먹고서 배를 앓았다. 제대로 된 인간은 그런 걸 먹지 않는다. 호리우치 군도 무진장 가난했다. 언제나 속을 비워서 비틀비틀 비틀거리며 걸어다녔다. 얼마 전까지(고작 4, 5년 전까지) 내 주변에는 차를 갖고 있는 인간이라고는 거의 없었다. 있었다고 해도 엄청나게 오래된 세 모델 전의 카로라(*토요타 자동차의 차 모델명. 우리나라 현대 소나타 정도인 듯)라든가, 지저분한 라이트에스(*토요타 자동차의 차 모델명. 우리나라 기아 카니발 정도인 듯)라든가, 그 정도의 차밖에 갖고 있지 않았다. 그리고 그러한 것이 당연하다는 듯 우리는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어느 틈엔가 모두들 기이하게도 가난하지 않게 되어 버렸다. 내 주변에는 벤츠를 갖고 있는 인간이 몇 명인가 있다. BMW를 갖고 있는 인간도 있고, 볼보를 갖고 있는 인간도 있다. 내 주변에 부자인 지인이 늘어난 것은 아니다. 옛날부터 알고 지내던 인간이 모두들 어쩌다 보니 가난하지 않게 되어 버린 것이다. 이건 뭐 나이에 따른 것이겠지. 모두들 나이를 먹어서, 어쩌다 그리 돼 버린 것이라고. 하지만 그와 더불어 세상의 풍조라는 것도 꽤 큰 요소가 아니었을까 하고 나는 생각한다. 정리하자면, 세상이 가난이라고 하는 것을 그다지 쳐주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다. 가난이라고 하는 것이 그저 돈이 없는 비참한 상황으로서밖에 여겨지지 않게 되어 버렸다. 그러니까 가난 자랑 따위 이제는 전혀 의미를 갖지 않게 되어 버린 것이다. 가끔 젊은 여자들과 만나서 얘기하면ㅡ변명하려는 건 아니지만, 정말로 가끔입니다ㅡ 그녀들은 딱 잘라 가난해지고 싶지 않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건 "희망"이 아니라, "신념 표명"이다. 상당히 딱 잘라서. "가난이 싫은 건가?"라고 내가 물으면, "완전 싫어"라고 말한다. "무라카미 씨는 옛날에 가난했었나요?"라고 물어와서, "그래요"라고 말하면, 그녀들은 대체로 꽤나 곤란한 표정을 짓는다. 그녀들에게는 가난이라고 하는 상황이 제대로 구체적으로 상상되지 않는 것이다. 상상할 수 없으니까 돌연 곤란해지는 것이다. 젊은 여자들을 곤란하게 해서는 나도 역시 난감해지니까, 그 시점에서 나는 서둘러 화제를 바꿔 버린다. 실수로도 가난 자랑 따위 입에 올리지 않는다. 그런 걸 얘기해 봤자 그저 언짢은 분위기가 될 뿐이다. 가난은 도대체 어디로 가 버린 걸까? 하고 나는 때때로 생각한다. 이런 이야기를 하면 정말로 늙은이 냄새가 난다고 여겨질 것 같고, 미움받을 것이라고 생각되지만, 옛날의(20년 전의 *이 책이 출간된 게 1989년이므로 여기서 20년 전이라 함은 1969년 혹은 그 이전) 여자들은 "가난 따위 절대 싫어"라고는 그다지 입에 담지 않았다. 적어도 내 주변에 있던 여자들은 그랬다. 그녀들은 돈보다는 일단 납득 가능한 삶을 살고 싶다고 하는 것이 우선이었던 것 같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실제로 그런 삶을 사는 여자가 많았다. 물론 그렇지 않은 여자도 한가득 있었다. 외제차를 모는 남자가 아니면 데이트 하지 않는다고 하는 여자도 있기는 했다. 하지만 그런 경우는 어디까지나 소수여서, 적어도 나와는 그다지 상관이 없었다. 내 주변에 있던 보통 여자들은 차가 없어도 돈이 없어도 그런 건 신경도 쓰지 않았다. 내게 돈이 없다면, 데이트를 해도 상대방이 돈을 내 주었다. 그런 건 부끄러움도 무엇도 아니었다. 우리가 바라고 있었던 것은 좀더 다른 것이었다. 물론 그 누구도 기꺼이 가난해지고 싶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것은 예의 통과의례이지 않은가 여기는 정도로 우리는 마음을 접은 채 생각하고 있었던 게 아닌가 한다. 그리고 실제로 그랬다. 실제로ㅡ이런 걸 쓰는 것이 무척 부끄럽지만ㅡ 가난은 참으로 즐거웠다. 여름의 오지게 더운 오후에 머리가 멍해져 찻집에 들어가 냉방을 쐬며 아이스 커피를 마시고 싶어도, 아내와 둘이서 "참자"라며 견디어 겨우겨우 집에 돌아와 보리차를 벌컥벌컥 마신다…… 그것은 그 나름대로 무척 즐거웠다. 그것은 지난 일이니까 즐겁다고 말하는 게 아니다. 그것은 돈과는 상관없는 것이다. 그것은 말하자면 상상력의 문제다. 상상력이라고 하는 것이 있으면, 우리는 대부분의 일을 헤쳐나갈 수 있다. 예컨대 부자로 있든지 거렁뱅이로 있든지. 가난은 도대체 어디로 가 버린 걸까? 가난은 사라져 버린 걸까? 일요일 아침에 집 근처를 산책하고 있으면, U 네크라인 셔츠에 축 처진 버뮤다 반바지, 고무 비치 샌들 차림의 아버님이 아파트 주차장에서 처량할만치 하얀 벤츠를 세차하고 있는 광경을 볼 수 있다. 그런 걸 보면 나는 "어이, 아재, 거 퍽 없어 보이네"라고 생각한다. "그건 당신 개인적인 편견 아니야?"라고 아내는 말하지만서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