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 노란 캐리어
(2013~2014년쯤 쓴)


끼이익 소리를 내며 한 여자가 들어선다. 좁은 현관에 발을 디디고 서 있는 모습이 왠지 아슬아슬해 보인다. 신발을 벗고 고개를 들자마자 목례를 한 후 이름을 말하는 그녀.
꽉 찬 신발장을 위아래로 훑더니 신발장 위에 신발을 올려놓는다.
"예약 확인 부탁드립니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더니 다시 고개를 돌려 등에 멘 배낭에서 주섬주섬 종이 한 장을 꺼낸다. 나는 종이를 복사한 후 그녀에게 돌려주었다. 정말 일부러 그런 건 아니지만, 원래대로 손바닥만하게 접은 종이를 돌려줄 때 그녀의 손등을 살짝 만져 버렸다. 내 손가락 위에 그녀의 손등, 그녀의 손바닥 위로 내가 올린 종이 한 장, 그 위로 파르르 떨리는 내 손가락.
숙소를 안내하기 위해 안내 데스크에서 나와 그녀의 옆에 선다. 노란 머리 색깔과 똑같은 노란 캐리어를 든 손이 힘겨워 보인다.
나는 남자답게, 가볍지 않은 그녀의 캐리어를 가볍게 들어 방까지 안내한다. 그녀는 작은 목소리로 고맙다고 말하며 내 뒤를 졸졸 쫓아온다. 나는 그녀가 잘 따라오고 있는지 슬쩍 고개를 돌려 확인한다.
오래된 주택을 개조해 만든 2층짜리 게스트하우스의 계단은 조금만 힘을 줘 걸어도 삐걱 소리가 난다. 여성용 공동 침실 안에는 이층 침대 네 개가 있다. 지금 남은 자리는 두 곳. 하나는 아래층이라 편하지만 머리맡 쪽의 커튼이 제대로 닫히지 않는다. 하나는 넓지만 문 바로 앞이고 이층이라 계단을 오르내리기가 약간 무서울지도 모른다.
"어느 쪽이 좋으세요?"
내 설명을 제대로 듣고는 있는 건지 두리번거리던 그녀가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어느 쪽이든 괜찮다고 말한다.
"그럼 여기로 할게요. 1번 자리예요."
'네-' 그녀의 작은 목소리가 귓가에 웅웅거린다.
"여긴 문 앞이라 캐리어를 놓기가 좀 그런데 다른 분 침대 앞에 같이 두실래요, 아님 침대 위에 놓으실래요? 공간은 있으니까."
그녀가 다시 두리번거리며 입술을 살짝 뗐다 깨물었다 뗐다 깨물었다 한다.
"가까운 데가 좋아요, 떨어진 데도 괜찮아요?"
그녀가 살짝 미간을 찌푸린다.
"아, 짐이 너무 무거워서 위에 올리기는-"
나는 그녀의 말을 듣다 말고 남자답게 캐리어를 번쩍 들어 이층 침대 위에 올린다. 남자는, 말보다 행동이다.
그녀가 눈을 크게 뜨며 짐이 무거워서 죄송하다고, 고맙다고 말한다. 조금 무겁긴 했다. 그렇다고 미안해 할 건 없는데. 나는 이런 일을 하라고 돈을 받는 사람이니까.
"궁금하신 게 있으시면 질문하세요."
넓지도 않은데 이층 침대가 네 개나 있어 여유 공간이 많지 않은 방에 그녀와 너무 가까이 서 있다. 양 옆에서 침대들이 나를 조여 오는 것 같다. 내 고개 아래 서 있는 그녀가 고개를 들어 좌우로 살짝 흔든다. 흔들리는 머리카락에서 나는 샴푸의 체리 향이 너무 가까워서 나도 모르게 숨을 참아 버렸다.
"없어요."
"그럼 편히 쉬세요."
돌아서서 문을 닫는다. 그녀가 계단을 살금살금 올라가는 소리가 작게 작게 들린다. 속도가 느리다. 역시 무서운 걸까. 이층 침대의 계단은 좁고 가파르다.
다시 데스크 안으로 들어선다. 화면 보호 상태로 바뀐 컴퓨터의 마우스를 잡고 두어 번 흔드는데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린다. 이번 손님은 진짜 금발이다. 침대는 커튼이 잘 닫히지 않는 자리로 확정이다.
이층으로 올라가는 동안 커튼에 대해 설명하며 양해를 구한다. 나보다 키가 큰 금발의 손님은 오케이라고 말하며 내 뒤를 성큼성큼 따라온다.
문을 열고 방으로 들어서며 이층의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문 열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을 테지. 씻을 준비를 하는 건지 어깨까지 오는 단발머리는 흐트러져 있고 손으로는 짐을 뒤적거리고 있다. 빨갛고 도톰한 입술은 아까부터 아주 살짝 벌어져 있다.
나는 황급히 고개를 앞으로 돌리고 다시 영어로 말하기 시작한다. 이런, 갑자기 R 발음이 잘 안 되는 것 같다. 금발의 손님은 질문이 많다. 나는 문 쪽을 힐끔거리며 열심히 대답을 한다. 갑자기 커튼이 닫힌다. 내가 힐끔거리는 걸, 봤을까.
오늘 오기로 한 손님은 다 왔다. 이제 딱히 할 건 없다. 누군가 조심조심 내려오는 소리가 들린다.
그녀가 다가와 초콜릿 과자를 내민다.
"짐이 너무 무거워서 죄송했어요."
"괜찮아요. 별거 아닌데."
"아니에요. 죄송해요."
"감사합니다."
그녀가 목례를 한 뒤 사라진다.



아침 7시 55분. 데스크의 문을 열고 컴퓨터를 켠다. 본체가 부르르 떨리며 모니터에 불이 들어온다.
손에 휴지 두 개를 들고 이층으로 올라간다. 화장실 문을 열고 휴지를 채워 넣는다. 화장실 쓰레기통은 아직 반도 차지 않았다. 방 안의 휴지통은 비워야 할까. 조심스레 문을 연다. 이층의 커튼이 열려 있다. 하얀 시트 위에는 그녀의 노란 머리카락.



저녁 7시 55분. 문이 열리며 그녀가 들어온다. 노란 머리가 살짝 젖어 있다. 소나기 예보가 있었는데, 우산을 들고 가지 않았나 보다. 나는 여느 때와 같은 인사말을 하고, 그녀는 살짝 목례를 한다.
"우산 필요하시면 저한테 말씀하세요. 구비하고 있는 게 몇 개 있으니까."
그녀가 신발을 신발장에 넣다 말고 고개를 돌린다.
"저도 우산 있어요. 오늘은 그냥."
그녀가 머리를 만지며 멋쩍게 웃는다.
물에 젖은 체리 향이 문득 가까워졌다. 붉은 입술이 열리며 무언가 소리가 튀어나온다. 갑자기 숨을 참아서인지 문득 어지럽다.
"… 옥상이 있나요?"
그녀의 분홍색 티셔츠에 간간이 찍혀 있는 붉은 얼룩.
"빨래 너시게요?"
그녀가 잠시 눈을 깜빡거린다.
"아, 그냥, 술을 좀 샀는데, 혼자 있고 싶어서."
그러고 보니 그녀의 손에 하얀 편의점 비닐 봉지가 들려 있다.
"아, 어쩌죠, 여긴 옥상은 없어요. 오래된 주택을 개조해서 만든 거라서."
갑자기 내 목소리가 크게 들린다. 데시벨을 낮춰야 하는데. 그녀는 왜 혼자 술을 마시고 싶은 걸까. 비까지 맞고서.
"저도 옥상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때가 있는데, 아, 죄송해요."
쓸데없는 말이 자꾸 입에서 튀어나온다. 데시벨은 내려가지 않는다.
"아, 네. 알겠습니다. 감사해요."
방으로 향한 그녀의 뒷모습이 머물렀던 자리를 바라본다. 한숨도 못 잔 사람처럼 자꾸 멍해진다.
시야에 갑자기 그녀가 나타난다. 눈이 마주치자 그녀가 살짝 웃어 보인다. 정신을 차리고서 나도 웃는다. 그녀는 다시 빛의 속도로, 그러나 아주 띄엄띄엄, 사라진다. 마구 자른 필름을 엉성하게 이은 것처럼 그녀의 움직임이 끊어져 보인다.
파전 냄새가 난다. 비 오는 날엔 역시 파전이다. 이런 날엔 나도 한잔 하고 싶다.
체리 맛이 날 것 같은 이상한 파전 냄새가 난다. 고개를 드니 그녀가 서 있다. 머리는 말라 있고, 옷의 붉은 얼룩도 보이지 않는다.
"파전 좀 드실래요?"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나는 것 같다.
"아, 좋죠, 파전. 근데 저 주셔도 돼요? 양이 많지 않은 것 같은데."
"저녁을 먹고 와서요."
그녀가 은박지 뭉치, 젓가락을 내게 건넨다.
"감사합니다."
손 안이 따뜻해진다.
"근데 혹시 여기 근처에 공원이 있나요?"
"아, 한 20분 정도 걸어가면 아주 큰 공원이 있는데, 호수도 있고. 근데, 음, 거긴 너무 크고 별로 안 가까워서. 음, 작은 공원도 근처에 있을 텐데, 어디였더라, 그게. 음, 아주 작은 공원이 있었던 것 같은데, 하하."
또 데시벨이 올라갔다. 헛웃음이 나온다. 그녀는 빤히 나를 보고 있다. 그녀는 작은 공원이 좋다고 말한 적이 없다. 혼자 있고 싶다고는 했지만 공원 크기와는 상관이 없다. 나는 왜 작은 공원을 떠올리려 애쓰고 있는 걸까. 그녀를 찾으러 갈 것도 아닌데.
"아, 여기서 왼쪽으로 5분쯤 가다가 주유소 있는 데서 오른쪽으로 꺾어서 10분쯤 가면 작은 공원이 있어요. 놀이터도 있고, 옆에 강도 있어요. 작긴 한데 벤치도 있고 앞에 슈퍼도 있어요. 경치도 괜찮고 있을 건 다 있으니까. 음, 거기가 좋을 것 같은데."
"아, 네. 감사해요."
허둥거리며 말하는 나를 가만히 보고 있던 그녀가 목례를 한 후 신을 신고 총총 사라진다. 흔들거리던 하얀 비닐 봉지의 잔상.
나는 자리를 뜰 수 없다. 나는 여기 있으라고 돈을 받는 사람이니까. 고개를 숙이고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싼다. 한동안, 한동안.



현관 앞에 그녀의 노란 플라스틱 캐리어가 놓여 있다. 아침을 먹은 건지 부엌에서 나오는 그녀와 스쳐지나며 인사를 했다. 밝게 인사하려고 했는데 목소리가 늘어져 버렸다. 그녀는 목소리를 내지 않고 목례를 한 후 스쳐갔다.
시간 맞춰 오느라 미처 다 말리지 못 한 머리를 말린다. 세면대 앞에 서서 드라이기를 켜고 머리에 뜨거운 바람을 쏘인다.
그녀는 조그만 가글 한 통을 들고 내 옆을 지나 세면대 끝 자리에 선다. 그녀의 볼이 부어오르고, 작고 빠르게 떨린다. 고개를 숙이고 하얀 거품을 뱉어 낸다. 그녀의 휘어진 등 위로 뻗어나가고 싶어하는 손에 힘을 주고 머리를 매만진다.
데스크로 들어가 컴퓨터를 켜는데 그녀의 목소리가 들린다.
"지금 체크 아웃 할게요. 감사했습니다."
"아, 네."
웃으면서 배웅의 말을 해야 하는데, 가라앉은 목소리의 단답밖에 나오지 않는다.
현관 앞에서 그녀가 머뭇거린다. 바닥에 신발이 너무 많다. 그녀의 캐리어가 더욱더 무거워 보인다. 그녀가 캐리어를 들어올리려 낑낑거린다. 캐리어는 들어올려지다가 아주 빠르게 내려오고 다시 들어올려지다 다시 빠르게 떨어진다.
"괜찮으세요?"
그녀는 멋쩍게 웃어 보이고서 신발에 닿지 않을만큼만 캐리어를 들어올려 밖으로 빼낸다. 손잡이를 붙잡은 어깨가 가라앉아 있다.
"조심해서 가세요."
가끔은, 행동보다 말이 필요할 때도 있지만 말다운 말이 생각나지 않는다. 내가 입을 움직이는 짧은 시간, 눈을 깜빡이며 나를 바라보는 그녀.
"감사했습니다."
내 말이 끝나자 그녀는 살짝 웃어 보이고서는 아까 했던 말을 반복한 뒤 목례를 하고 사라졌다.
나는 제대로 닫히지 않은 문을 닫는다. 문 너머에 아직 서 있을까. 내가 문 닫는 걸 봤을까. 안녕, 잘 가요.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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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LoveLoveLove
(2018년 작)


널 보고 있어도 난 그립기만 해
널 그리워하면서도 그립기만 해
너에게 닿고 싶어 난 손을 뻗지만
그 거리는 언제나 내게는 멀기만 해

―S < I miss U > 중에서

스마트폰 화면을 뚫어져라 바라본다. 거기에 내 사랑이 있다.
사랑이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을 거의 100% 확신하고 있는 상태에서 누군가를 열렬히 좋아한다는 게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사랑을 바치는 상대가 내게 차가운 눈빛으로 이별을 고한다거나 가시 돋친 말로 상처를 줄 일도 거의 100% 없을 거라는 점에서 꽤 안전한 일이기도 하다. 혼자 꿈꾸는 아름답고 안전한 사랑에 일단 길들여지면 여기에서 벗어나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나는 3년째 한 사람을 사랑하고 있다. 그 사람에게 내 사랑을 고백한 지는 이미 오래되었지만 그 사람이 그걸 기억할지는 모르겠으며, 그 사람이 내게 사랑을 말한 지도 이미 오래되었으나 그 사랑은 정확히 나만을 위한 것은 아니다.
그 사람은 늘 이렇게 말한다.
“팬 여러분, 사랑해요.”
다수에게 바치는 세레나데를 들으며 나는 기뻐한다. ‘나는 비혼주의자이지만 네가 결혼하자고 하면 지금 당장이라도 할 수 있어.’라고 생각하기도 하지만 이건 아마도, 그런 일이 생길 가능성이 거의 없기 때문일 것이다.
그에게는 그를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수만 명의 팬이 있으나 나는 부모님에게서도 그런 맹목적인 사랑이나 믿음을 받아 본 적이 없다. 나는 수만 명의 팬 중 하나일 뿐이고, 사람을 가장 빨리 판단할 수 있는 기준인 겉모습으로 평가한다고 했을 때 그 수만 명 중에서 과연 몇 등이나 할 수 있을지 가늠조차 불가능하다. 수만 명의 팬들 속에서 운 좋게 그의 눈에 띄어 정말 프러포즈를 받게 된다고 하여도, 나는 아마 내 자신이 부끄러워서 옆에 서지도 못할 것이다. 키는 177cm로 엄청 큰 키는 아니지만 얼굴이 작아 9~10등신은 족히 돼 보이는 그의 옆에 서 있는 나를 상상하기만 해도 왠지 울적해진다. 내가 그와 어울릴 만한 인물이었다면 난 그의 팬이 되는 대신 연예인 지망생이 되었을 것이다. 지금 이 상태 그대로이더라도, 내가 그와 정말 사랑에 빠지고 싶었다면 성형을 하든 지옥 다이어트를 하든 로비를 하든 뭘 하든, 어떻게든 연예인이 되려고 했을 것이다. 내가 정말로 그와 쌍방향 사랑에 빠지고 싶었더라면.

내가 좋아하는 그는 S라는 그룹의 여덟 멤버 중 한 명이다. 메인 보컬도 아니고 랩퍼도 아니고 아티스트형 싱어송라이터도 아니고 개그 담당도 아니다. 노래도 보통이고 랩도 보통이고 춤도 보통이지만 얼굴과 사랑스러움만큼은 원톱인, 그런 멤버다. 그는 예쁘고 잘생긴 얼굴과 해맑은 미소로 사랑스러움을 발산하며 수십 만의 팬카페 회원 중 수만 명을 사로잡았다.
나는 태어나기를 일편단심 민들레형으로 태어난 터라 그에게만 애정을 쏟아붓는다. 한 명만 좋아하기에도 돈과 시간이 부족한 마당에 누구를 더 좋아하겠는가.
나는 S 그룹의 공식 팬카페 회원이며 내가 가장 아끼는 멤버인 그, L의 공식 팬카페 회원이고 L의 팬페이지 운영자―전문 용어로 홈마라고 불리는―이기도 하다. 일주일에 적어도 5~6개인 공연 스케줄을 되도록 모두 보러 가서 사진 및 동영상을 찍어 올리는 것이 팬페이지 운영자로서의 내 역할이다.
언젠가 L은 모 라디오 방송에서 팬카페나 팬페이지를 둘러보는 게 취미라고 말한 적이 있는데, 가끔 자신의 SNS에 내가 찍은 사진을 올리기도 한다―한마디로 ‘불펌’이지만, L의 허락 없이 L의 사진을 찍은 것부터가 L의 모습을 불펌한 것이므로, 전문 용어로 쌤쌤(same same)이라고 할 수 있겠다. 내가 찍은 사진이 L이 만들고 L이 관리하는 공간에 올라오면 나는 수만 명―약간 허세를 부리자면―의 팬들이 나를 부러워하고 질투하는 말을 듣는다. L과 내가 꽤 친한 사이일 거라고 떠들어대는 이들도 있다. 물론 이건 사실이 아니다. L은 나를 알기는 할 테지만 내 이름, 정확히 말하자면 내 닉네임만을 알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알려져 있지만 익명의 존재나 다름없다.

유월의 어느 화요일 밤, 여기는 어느 대학교 광장이다. 민주광장이라고 하는데 민주주의와는 아무 관련이 없어 보이는 행사와 사람들로 채워져 있다. 아니, 이렇게 다양한 사람들이 자유롭게 뭔가를 즐길 수 있다는 게 민주주의인가. 그렇다면 여기는 민주주의로 꽉 찬, 그야말로 민주적인 민주광장이다. 아무튼, 나는 S 그룹, 정확히 말하자면 L을 기다리고 있다. 커다란 렌즈를 단 커다란 카메라를 든 채 대학교 축제가 열리고 있는 여기에 서 있다.
S 그룹을 보러 온 듯한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교복을 입은 사람도 있고, 플래카드를 든 사람도 있고, 나처럼 카메라를 짊어진 사람도 있다. 그들은 기다림에 몰두하느라 축제의 민주광장 속에서 축제를 즐기지 않기에 눈에 띈다.
시끄러운 축제의 소리 속에 간간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섞여 들린다. 교복 입고 여긴 왜 왔냐, 저 나이 먹고 가수 쫓아다니고 싶을까, 카메라 비싸 보인다, 돈 많으니까 일은 안 하고 저러고 다니겠지 등등.
10대는 공부는 안 하고 뭐하는 짓이냐는 소리를 듣고, 10대를 넘어서면 애도 아닌 게 뭐하는 짓이냐는 소리를 듣는 게 팬질―팬으로서 하는 모든 일을 흔히 팬질이라고 하는데 좀 더 비하하는 말로는 빠순질이라는 용어가 있다―의 세계다. 그러니까 팬질은, 언제 해도 좋은 소리 듣는 건 힘든 일이라는 것이다.

< 팬질의 단계 >
1단계: 유튜브나 텔레비전 등 방송 보며 좋아하기―이건 보통 시청자들도 하는 일 아닌가 싶을 수도 있지만 수많은 영상을 찾아보며 즐기는 것도 애정이 없으면 할 수 없는 일이다.
2단계: 연예인 SNS나 팬 블로그, 커뮤니티 등을 방문해 ‘눈팅’하기―‘눈팅’은 참여하지 않고 눈으로 보기만 하는 행위를 지칭하는 용어로, 본디 채팅방에서 생겨난 말이나 지금은 두루두루 쓰이고 있다.
3단계: 공식 팬카페나 팬클럽 등에 가입해 공식 팬 되기―누구누구의 팬덤 소속이라는 소속감이 솟아오른다.
4단계: CD, DVD나 음원 등 아티스트의 예술품을 비롯해 기타 굿즈 구입하기―유튜브에서 광고를 시청함으로써 에둘러 돈을 지불하는 방식이 아니라 직접적으로 ‘자기 돈’을 썼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여기까지 오고 나면 발을 빼기가 쉽지 않다.
5단계: 소속사에서 공지한 스케줄에 맞춰 실제로 보러 다니기―돈에다가 시간까지 들어갔다. 학교나 직장을 빠지기 위해 거짓말을 하게 될 수도 있다. 거짓말까지 하면서 보러 간다는 건 일상의 평온이나 양심의 가책보다 ‘내 아티스트’를 눈으로 영접하는 게 더 중요해졌다는 증거다.
6단계: 비공식 스케줄까지 쫓아다니기―이쯤 되면 자기 생활보다 아티스트 영접이 더 중요해진 것으로 보인다. 나는 5단계에서 멈췄으므로 6단계 이후의 심정은 느껴 본 적이 없기에 그저 추측해 볼 뿐이다.
7단계: 사생활까지 쫓아다니기―스토커라고도 불리는 사생팬이 된 것이다. 자기는 없고 아티스트를 보러 다니는 존재만 남게 된 것으로 보인다.

―By LoveLoveLove 홈마 3Love. ―팬질의 단계를 정리해 보았다. 어디까지나 주관적인 것임을 밝혀 둔다.

보통은 5단계부터 ‘빠순이’라는 말을 듣게 된다. 빠순이라는 말을 처음 들으면 기분이 나쁘지만―집창촌에서 생겨난 말이라는, 용어의 유래까지 어디서 듣게 되면 더더욱― 계속 듣다 보면 익숙해져서 스스로 자신을 빠순이라 칭하게 되기도 한다―이런 게 가스라이팅일까?―.
나는 스토커는 아니고 그냥 ‘빠’이다. L은 팬질 5단계까지의 팬들만 팬으로 인정한다고 모 매체와의 인터뷰를 통해 밝힌 바 있다. 허허실실하며 해맑은 미소를 ‘뿜뿜’하는 L의 모습을 떠올려 보면 “사생팬도 팬이니까 감사하다.”라고 말해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은데, 단호해야 할 때는 단호하다고 할 수 있다―이런 카리스마에 내가 또 반한다. 나는 L에게서 미움받으면서까지 L에게 다가가고 싶지는 않다. L이 내 실체를 알게 되는 것도 원하지 않는다. L이 개인인 날 보는 순간 난 부서져 버릴지도 모른다. L이 실재하는 나를 알 수 없기 때문에, L에게 나는 군중으로서 존재하기 때문에 나는 L을 사랑한다.

무료했던 한낮, 무가지의 연예면에서 L의 존재를 알게 됐었다. 여덟 명이나 되는 남자아이들이 얼굴을 모으고 찍은 사진 속에서 L이 눈에 띄었던 이유는 단지 머리카락이 아주 붉었기 때문이었다. 새빨간 머리만큼 붉었던 입술, 그것들과 대비됐던 새하얀 얼굴. 별 생각 없이 무가지를 훑어본 뒤 나는 그것을 버렸다. 내가 L을 잊지 않게 됐던 건 무가지 때문이 아니었다. 무가지를 버린 지 10분도 채 지나지 않아 나는 L을 실제로 보았다. 아직 신인이어서였는지 L은 아무렇지 않게 지하철을 기다리고 있었다. 새빨간 머리와 잘생긴 얼굴, 탁월한 패션 감각이 지나가던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지만 아무도 그가 L이라는 사실은 모르는 것 같았다. 나는 어디에서 많이 본 것 같다고 생각하며 L을 쳐다보다 L과 눈이 마주쳤고, 순간 무가지에서 봤던 L과 내 앞에 있던 L이 겹쳐졌다. L은 너무나도 하얘서 반짝반짝 빛이 났고, 새빨간 머리카락과 입술은 금방이라도 터져서 피가 흘러넘칠 것만 같았다. L은 이내 내게서 시선을 거뒀지만―길거리에서 자신을 쳐다보는 모르는 사람들이 어디 한둘이었겠는가!― 나는 하얗고 빨간 L을 쳐다보다 지하철을 놓쳤다. 지하철 유리문 너머에 있던 L의 모습이 빠른 속도로 멀어져 갔다. 붉은 흔적만이 내 눈동자 속에서 날 어지럽혔다.
나는 다시 무가지를 가지러 갔고, L이 속한 그룹명 등을 확인한 뒤 곧장 CD를 사러 갔다. CD가 눈에 띄는 자리에 있지 않아 찾는 데 약간 시간이 걸렸다. 그리 힘 있는 소속사는 아닌 모양이었다. 데뷔작인 싱글 음반은 총 아홉 종류였다. 나는 재킷 표지에 멤버 전원의 사진이 실린 것 한 장, L의 사진이 실린 것 한 장, 총 두 장을 골랐다. 한정 수량이라는 포스터는 아직 꽤 남아 있었다.
서랍장을 뒤져 오랜만에 은색 SONY CDP를 꺼내 CD를 들었다. 처음에는 어떤 게 L의 목소리인지 알 수 없었으나 L의 사진이 표지인 CD에 L의 솔로곡이 들어 있었다. L의 목소리에서는 창백하면서도 따스한 느낌이 났다.

눈을 감으면 너의 모습이 보여서
손을 뻗으면 꼭 닿을 것만 같아서
눈을 뜨면 네가 사라질까 두려워
눈을 뜰 수 없어 눈을 뜰 수 없어
눈을 감은 채 그저 어둠 속을 헤매
눈을 감은 채 허공으로 손을 뻗어
널 찾아 헤매 널 그리며 눈을 감아

―L < Where R U > 중에서

팬들의 괴성이 이어졌다. L이 손을 들어 보이고는 무대 밑으로 내려갔다. 몇몇 사람들은 수많은 사람들 틈을 비집고서 S 그룹 멤버들이 가는 방향으로 뛰어갔다. 나는 여느 때처럼 그냥 잠시 가만히 서 있었다. 축제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팬들이 빠져나간 자리는 이내 다른 사람들로 채워졌다. 세상에는 사람이라는 존재가 많고도 많아서 빈 자리가 금세 채워지고 떠난 사람이 쉬이 잊혀진다. L도 나도 이 점은 마찬가지다. 그래도 누군가의 기억에서 생존할 가능성이 더 높은 사람은 당연히 L이다. 내가 그를 기억할 것이고, L에게는 그를 추앙하는 수많은 팬들이 있으니까.
나는, 나를 기억해 줄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다. 팬페이지 LoveLoveLove 홈마 3Love로만 내 존재를 인지하고 있을 L이 날 기억해 줄까? L이 날 기억한다 해도 그건 현실의 내가 아니라 그저 홈마 3Love라는 아바타를 기억하는 것일 테다. 수많은 팬페이지 중 하나인 LoveLoveLove에 들어올 팬들도 마찬가지다. 그들에게 나는 어느 개인이 아니라, 홈마이다.

사랑한다 소리치고
내 곁에서 사라진 너
날 보면서 웃었던 너
날 보면서 울었던 너

어쩜 그렇게 가볍게
어쩜 그렇게 차갑게
떠나가는 건 한순간

그래도 즐거웠어 나
그래도 고마웠어 나
내가 널 기억할게
내가 널 사랑할게

―S < I remember U > 중에서

캄캄한 밤 외로이 도로를 질주하는 심야고속버스 속에서 L의 목소리가 담긴 노래를 들었다. 불과 2~3시간 전에 보았던 사람인데 지금은 닿을 수 없는 거리에 있다. 말할 수도 만질 수도 없는 사람을 맹목적으로 쫓는 나는 왜 이러고 있는 걸까. 생각하고 생각하면서 L의 사진과 영상이 담긴 DSLR 카메라를 꺼내 L의 모습을 돌려 본다. 작은 액정 속에 담긴 L은 이미 지나 버린 시간이다. 지나간 사람이다. 사진을 보며 눈으로는 울고 입으로는 웃고 있는 나. 화면이 흐려진다. L을 바라보다 돌아오는 길에는, 바라만 보다 돌아오는 길에는 늘 눈물이 난다. 굵은 물방울이 뚝뚝 떨어져 내린다. 보고 또 봐도 나는 외롭다. 보지 않으면 아프다. 아픈 것보다는 외로운 게 낫다고 생각한다. 지금은. 지금의 나는.

급히 화장실에만 다녀온 뒤 방바닥에 퍼질러 앉아 노트북을 켰다. 카메라를 연결한다. 몇 시간 전에 찍은 L의 모습들을 불러오고 정리한다. 흔들린 사진도 지우지 않는다. 언제나 내 곁에 있을 수 없는 L의 1분 1초가 내게는 소중하다.
잘 나온 사진들을 추려 보정 작업을 했다. 몸짓 하나하나가 우아한 L의 모습에 경탄하며 작업을 하고 사진과 영상을 LoveLoveLove에 올렸다. L이 멋지면 멋질수록, 아름다우면 아름다울수록 나는 L에게 찬사를 보내고 그 찬사의 무게에 비례해 나는 짓눌린다.
덧글이 달리길 기다리며 샤워를 했다. 거울 속 내 모습이 내 머릿속 L의 모습과 비교돼 비참해졌다. 이게 현실이라고, 수건으로 내 비루한 덩어리를 닦으며 생각했다.

<< L군, 오늘 진짜 멋있었어! 또 보고 싶다. ―Lomantic
<< ㅠㅠx100000000000000000 ―IinLinS
<< 홈마님 너무 감사해요!!! 직접 못 봐서 늘 아쉬운데, 귀염 뿜뿜 우리 L, 늘 예쁘게 예쁘게 찍어 주셔서 감사해요!!! ―L바보
<< 하앍하앍 //-// ―19L순이
<< 자기 전에 잘생긴 우리 오빠 봐서 너무 좋아요. 감사합니다! ―중L병

스크롤을 내리며 덧글들을 훑어본다. L만을 좋아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단지 자신이 좋아하는 것들 중 하나가 L인 사람들도 있다. 어느 쪽이든, 그들에게 L이란 삶의 따분함을 달래 주는 게임 같은 게 아닐까. 캐릭터를 바꿔 가며 즐길 수 있는 게임, 게임 자체가 질리면 지우고 다른 게임을 할 수도 있는 게임. 마음 한구석에 늘 빈 자리가 있고, 그게 너무 공허해서 누군가를 앉혀 놔야만 하는 것. L 대신 다른 누군가가 그 빈 자리에 들어와도 그들 삶에는 별 지장이 없을 것 같은 것. 나를 비롯해.
허무한 짓이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나의 눈은 L을 보고 황홀해 하고 나의 귀는 L을 듣고 녹아 내린다. 내 이부자리 위 천장에 붙여 놓은 L의 포스터를 보며 잠드는 나는 꿈속에서도 L을 볼 수 있기를 기대한다.

눈을 감은 채 그저 어둠 속을 헤매
눈을 감은 채 허공으로 손을 뻗어
널 찾아 헤매 널 그리며 눈을 감아

―L < Where R U > 중에서

* 본 소설에 나오는 단체, 인물, 가사 등은 모두 작자의 창작이며, 혹여 실재하는 무엇과 비슷한 정황이 있더라도 관련이 없는 허구임을 알려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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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파수 잡기


아픈 눈을 뜨면 지지직
라디오 주파수 잡는 소리가 들려요
눈꺼풀에서도 지지직 소리가 나는 것만 같아
희미한 아침 햇살에 따끔거려요

이마 안쪽 벽을 타고 지지직
지난 밤 꾸다 만 꿈이 흘러가요
잡고 싶기도 하고 버리고 싶기도 한
신나고 괴상한
왼쪽 가슴 저 밑을 닳고 닳은 손톱 끝으로 간지럽히는
온전히 눈을 뜨면 날아가 버리는
저 먼 세상에 살고 있는 또 다른 내 모습은 아니었을까
그리워져 서글퍼지는 꿈

내 귀는 끊임없이 주파수를 잡아요
잡아도 잡아도 잡히지 않는

매일 밤 눈을 감으면 같은 곳
눈을 뜨면 사라지는
뿌연 잔상 위로
시리고 뜨거운 것이 주르륵
흘러내려서 두 볼에 말라붙어요

그곳의 나도
이곳의 나를 희미함으로 만나며
이유도 모르면서
눈물을 흘리지는 않을까

꿈속의 내게는 이 글을 쓰는 내가 꿈이고
나의 하루를 매일 밤 지켜보며
눈을 뜨면 사무치는 슬픔으로
가슴 한쪽을 부여잡고 울까요?

심장을 만질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아프고 간지러운 내 심장을 토닥토닥
어루만질 수 있다면
나는 늘 애꿎은
왼쪽 가슴을 쿵쿵 두들겨요

아파
아프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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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개(누군가의 인생)


그르륵 그르르르륵 그륵
옆집 개가 뭔가를 긁어대고 있다
사지를 쭉 뻗으면 신장이 사람과 비슷할 듯한 옆집 개는
뒤뜰이라고 하기가 민망한 시멘트 바닥 위에서 맴맴 돌거나 낮잠을 자거나 가끔 울거나

옆집 아저씨는 한낮에 개를 자꾸 때린다
때리면서 밥을 준다
아무나 보고 짖지 말라면서 때린다
아저씨보다 이빨이 튼튼할 옆집 개는 낑낑거리기만 한다

옆집 아줌마는 한밤중에 개를 때린다
뭐라뭐라 소리를 지르면서 때린다

나는 그저 잠을 청하며 가만히 듣고 있다

옆집 개는 제 몸의 10배는 겨우 되려나 싶은 시멘트 바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시멘트 바닥의 끝에도 미치지 못하는 줄에 매여서

가끔 옆집 개와 눈이 마주치면
녀석은 그 까만 눈동자로 나를 아주 빤히 쳐다보고
그럼 나는 괜스레 미안한 마음이 들어 고개를 돌리고



몇 년 전 쓴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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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사람의 휴일


아침에 일어나 세수하고
뒹굴거리며 책을 읽고
물을 마시고
햇살에 눈을 비비며 낮잠을 조금 자고

나른한 배를 쥐어잡고
구토를 한다

이 빌어먹을 세상
하면서 뉴스를 본다

동네 놀이터에 나가 타지도 않을
놀이기구들 사이를 걷다
집으로 돌아오는 사이에 해가
저 멀리로 사라진다

별들이 사라진다
사라지지도 않는다

밤은 컴컴하지도
컴컴하지 않지도 않다

풀벌레 소리 대신 술 취한 사람들의
술주정 소리



2023.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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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BtWaBc8dV1k


마음이 쓸쓸할 때 듣고 싶어지는 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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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MT8xMVU6d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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