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직 안 돼서 뭐하고 사나 할 때 쓴 글인 듯...



‘인간의 모든 문제는 인간이 먹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 없다는 데서 비롯한다.’
밥을 굶은 지 사흘째 되던 날 유미는 생각했다. 유미가 회사를 관둔 지도 벌써 반년이 지났다. 처음 한두 달은 뭣도 모르고 그간 못 했던 일들도 하고 해외여행도 한 번 다녀오고 그러다 보니 평소 회사 다니던 때보다 돈을 훨씬 더 많이 써 버렸다. 아껴 쓰면 1년을 쓸 수 있을 거라 생각했던 돈이 두 달 만에 반으로 줄어들자 유미는 약속을 잡지 않게 되었다.
유미는 저번 달에 통신 계약을 해지한 스마트폰을 들고 집 근처 체육공원에 나와 와이파이 신호를 잡았다. 당장 돈을 받을 수 있는 일용직 아르바이트를 알아봐야 한다. 아니면 기본적으로 밥을 주는 음식점 일이라거나. 차비가 들면 안 되기에 되도록 가까워야 하고 복장 규정이 있어서 옷을 사야 한다거나 하면 안 된다.
평일 오전, 공원에 나와 있는 젊은 사람은 유미뿐이었다. 연세가 지긋해 보이는 어르신들이 어렵지 않은 운동기구를 이용하며 시간을 보내거나 손자와 놀아 주고 있었다.
유미는 식수대에 가서 물을 마신 후 아르바이트 사이트에 접속해 지역을 설정하고 화면을 훑었다.
‘<편의점 평일 오전> 하루 6시간, 식사 제공’
걸어서 5분이면 갈 수 있는 거리. 식사 제공이라고 해 봤자 폐기된 도시락을 먹을 수 있는 정도겠지만 그게 어딘가.
“안녕하세요. 아르바이트 모집한다는 글 보고 왔는데요.”
스마트폰을 들여다보고 있던 사장은 안경을 고쳐 쓰며 유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 그래요.”
손님 한 명이 들어왔다.
“잠깐만 기다려요.”
“네.”
손님은 담배 한 갑을 사서 금방 나가 버렸다.
“어디 살아요?”
“체육공원 근처요. 걸어서 5분 정도 걸려요.”
“아, 좋네. 나이는?”
“서른이에요.”
“음, 결혼은 안 했어요?”
“네.”
“서른이면 취직을 해야지, 왜 알바를 하려고 그래?”
“예?”
들어가는 회사마다 서열에 따른 사내 정치에 적응을 못 해서 관뒀다는 말을 해야 할까. 유미는 지속적인 관계, 관계 유지를 위한 노력을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을 하고 싶었다.
“언제부터 일할 수 있어요?”
“언제부터 일하면 되는데요?”
“그럼 오늘부터 해 볼래요? 알바생이 원래 오늘까지 나오기로 했는데, 어제부터 갑자기 못 나오게 됐다고 해서. 지금 내가 있으니까, 일 어떻게 하는지 보고. 내일이나 모레부터는 혼자 하고.”
유미는 얼떨결에, 생각보다 쉽게 일자리를 구했다. 유미가 찾아간 시간이 마침 오후 1시 50분쯤이어서, 사장은 2시부터 5시까지 세 시간 동안 일을 하라고 했다. 유미가 내일부터 일해야 하는 시간은 새벽 6시부터 낮 12시까지 6시간이다. 오늘의 두 배씩 일주일에 5일간 일을 하면 된다.
유미는 세 시간 동안 사장님을 따라다니며 관찰했다. 편의점 일은 손님이 오면 인사하고 계산하고, 바코드를 찍고 화면에 나오는 대로 진행하고, 물건이 빠지면 채워 넣고, 손님이 뭔가를 먹고 어지르고 가면 치우고, 그런 당연한 것들뿐이었다. 손님은 오래 머물러야 20분 정도였고, 한꺼번에 많이 와 봐야 4~5명이었다. 유미는 이 정도 일이라면 나도 충분히 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수고했어. 내일부터 6시에 나오면 돼. 근데 밥은 먹었어?”
“아, 못 먹었어요. 인터넷으로 찾아보고 바로 오느라.”
“식사는 손님 없을 때 눈치껏 폐기한 거 아무거나 먹으면 돼. 삼각 김밥, 샌드위치, 도시락 뭐 이것저것 있는데, 폐기한 건 폐기 찍어서 창고 냉장고에 넣어 놓거든? 이리 와 봐.”
사흘째 굶은 유미의 눈에는 폐기 냉장고가 고급 뷔페처럼 보였다, 라는 건 거짓말이지만 어쨌거나 침이 꼴깍 넘어간 건 사실이었다.
“알바가 안 먹으면 어차피 버리니까, 먹고 싶은 거 있으면 가져 가.”
유미는 마음 같아서는 다 들고 가고 싶다고 생각했지만 삼각 김밥 두 개와 샌드위치 하나를 고르고서 이 정도면 된 것 같다고 말했다.
“내일 올 때 등본이랑 통장, 이력서 들고 오면 돼. 늦지 말고.”
“네,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유미는 편의점에서 나오자마자 삼각 김밥 하나를 뜯었다. 삼각 김밥과 샌드위치가 든 편의점 봉투를 손에 들고 차디찬 삼각 김밥을 먹으며 집으로, 아니, 체육공원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너무나도 가벼웠다. 실은 너무 어지러워서 몸이 제 몸 같지 않아 발이 들썩이는 것이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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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15년 전쯤에 쓴 글인 듯. 실화 기반. 지금 내 꼬라지를 봐도... 다단계는 안 하길 잘한 게 맞는데... 허허. 참... 이때 이 분들은 뭐하고 계시려나. 다들 나보다는 잘살고 있을 듯하다는 생각도 들고. 어쨌든 자기 확신이 굉장히 투철한 사람들이었으니까. 성공에 대한 욕망, 삶에 대한 집착. 이런 게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의 차이...



“너 같은 애는 이거 안 하면 창녀밖에 할 게 없어.”
나는 팔뚝만 움켜쥐었다. 피가 흘러내렸다.
며칠 전 나는 영희 언니의 손에 끌려 이곳에 발을 디뎠다. 무슨 설명회를 한답시고 조그만 방에 수십 명을 몰아넣고서는 서너 명이 돌아가며 자기 자랑을 강의랍시고 해 댔는데, 사람만 바뀌고 내용은 같은 그 이야기들을 듣자마자 나가고 싶었지만 영희 언니가 조금만 더 들어보라며 붙잡는 바람에 그냥 남아 있었다. 강의가 끝나기도 전에 나간 사람이 1/4, 강의가 끝나고 나간 사람이 또 1/4, 하루 뒤 나간 사람이 또 1/4. 아직도 남아 있는 사람들 중 아직도 계약서에 사인을 하지 않은 사람은 나뿐이다.
영희 언니와 안 지는 2년 정도 됐다.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매일 아침 라디오를 듣다가 사연을 보냈는데 연극 입장권을 준다고 했다. 한 장이면 되는데 두 장을 준다고 했다. 학교에서 같이 밥을 먹거나 같이 수업을 듣는 동기는 있었지만 주말에까지 만날 수 있는 동기는 없었다. 공짜 표인데 팔기도 그래서 인터넷 연극 동호회에 같이 갈 사람을 구하는 글을 올렸더니 언니에게서 연락이 왔다. 어차피 남는 표였지만 내 덕에 공짜로 연극을 보는 건데도 언니는 고맙다는 말을 한다거나 밥을 산다거나 하지 않았다. 평소에 받는 걸 어려워하는 터라 크게 신경쓰지는 않았지만, 보통 사람들과는 약간 다른 언니였다. 잘 나가는 회사에 다니고 있다고 만날 때마다 자랑을 하면서도 밥을 한 번 사기는커녕 늘 돈이 없다고만 해서 오히려 내가 밥을 산 적이 더 많았다. 방학 때 고향집에 놀러오기도 했다. 전국 여행 중이라며 찾아온 언니에게 부모님은 여비로 쓰라며 돈까지 쥐여 주었다. 고등학교 졸업 후에는 나도 그만한 돈을 용돈으로 받은 적이 없는데도.
내가 언니에게 뭘 받았는지 따져 보면 딱히 받은 건 없었다. 뭘 받았는지 뭘 줬는지 따져 보면 인간관계라는 게 너무 끔찍해지는 것 같아서 의식적으로 따져 보고 싶지는 않았다. 만나고 싶어서 만나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나에게 딱히 나쁘게 한 일은 없어서, 연락이 오면 그냥 만났다. 거절할 수 있는 이유가 없었으니까.
만난 지 2년이 다 돼 갈 무렵, 영희 언니가 회사 사람들을 소개해 주고 싶다며 나를 회사 근처로 불러냈다. 영희 언니, 언니의 회사 사람 두 명과 함께 공원에서 도시락을 먹었다. 술집을 경영했다는 남자 한 명과 간호사를 했다는 언니 한 명. 그들은 지금 회사를 알게 되고 정말 좋은 회사라는 확신을 받아 하던 일을 접고 회사에 들어왔다고 했다. 밥을 먹고 산책을 하는 내내 영희 언니를 비롯한 세 명은 꿈에 젖은 표정으로 지금 다니고 있는 회사가 너무 좋다며 우리는 지금 너무나도 행복한 꿈을 그리고 있다고 얘기했다.
“수지야, 너도 우리랑 같이 하지 않을래?”
“수지 씨, 깊이 생각할 게 뭐 있어? 함께해요.”
세 명의 사람이 똑같은 표정으로 웃었다.
몇 주 뒤, 지하철역 입구에서 영희 언니를 기다렸다. 한여름 대낮의 거리는 한산했다. 간간이 사람들이 지나갔다. 언니는 언제나 늦었다. 처음 만났던 날에도 늦어 나는 표를 제공하는 입장임에도 한참을 기다리다 저녁을 먹지도 못 한 채 연극을 보고서는 그냥 헤어졌었다.
“수지야, 잘 왔어. 우리 커피라도 마실까?”
대낮의 커피숍 안은 텅텅 비어 있었다. 커피숍으로 오는 길에는 학교도 있고 주택도 있고 아파트도 있었는데, 왜 이렇게 텅텅 비어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오늘은 내가 살게.”
“월급 받으셨어요?”
“아니, 왜?”
“아니, 갑자기, 언니가 사신다고 하니까.”
언니가 웃었다. 언니가 시켜 준 아이스 음료는 너무 차가웠다.
“언니 일하는 회사 같이 가 보자. 알바 자리 하나 났거든. 너 알바 구한다며.”
“저 방학 때는 서울에 안 있을 거라서. 집에 내려가려고요.”
“왜?”
“굳이 여기 있을 이유가 없는 것 같아서요.”
“내려가기 전에 한 번 해 봐. 돈도 벌고, 좋잖아. 응?”
“언니, 혹시 이거 다단계 아니에요?”
“아니? 아닌데.”
“왠지 느낌이 그래서. 아니면 됐어요.”
언니를 따라 들어간 베이지색의 낡은 2층 건물 안에는 많은 사람들이 어지러이 서 있었다. 필름 상태가 좋지 않은 흑백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 것 같았다. 오래돼 보이는 실내, 뿌연 창문 사이로 들어오는 칙칙한 햇빛, 자기 갈 길을 모르는 듯한, 동공이 흐릿한 사람들.
“자자, 주목하세요. 여기 자기소개서 있는 거 가져가서 간단하게들 쓰시고요. 잠시 뒤에 강연 시작하니까, 다들 강의실로 들어가세요.”
안경 낀 남자가 박수를 몇 번 치고서는 목소리를 높여 말했다. 사람들의 시선은 한순간에 안경 낀 남자에게로 쏠렸다. 남자는 고가 브랜드의 옷을 입고 있었지만 싸구려 옷에 로고만 박아 놓은 느낌이 났다.
강의는 지루했다. 들어오는 사람마다 처음부터 끝까지 자기 자랑이었다. 이해가 되지 않는 점도 많았다. 꿈을 꾸라고 말하면서 돈을 버는 것에 집중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돈 얘기였다.
“제가 교대 나와서 교사 하다가 왜 관뒀는지 아세요? 이 사업의 미래를 봤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지금은 교사 연봉보다 더 많은 돈을 벌죠. 저처럼 되고 싶지 않으세요? 얼마 전부터는 저희 남편도 같이 일하고 있어요. 남편도 교사였는데, 제가 설득했죠. 왜 그랬겠어요?”
“제가 명문대 나와서 대기업 다니다가 왜 관두고 이걸 하고 있겠어요? 대기업보다 이게 더 좋으니까 그런 거예요. 저 지금 삼십대 초반에 BMW 끌고 다닙니다. BMW 다들 아시죠? 남자라면 다들 이 정도는 꿈꾸잖아요. 대기업 다녀 봤자 BMW 못 몰아요. 야근에 시달려 봤자 겨우 돈 몇 백 받는 게 다예요.”
그들의 꿈은 돈이었으며, 이 회사는 그들에게 돈을 벌게 해 줄 수 있는 곳이었다. 그들이 설명해 준 돈을 벌 수 있는 방법은 아주 간단했다. 내 밑으로 사람들을 차곡차곡 쌓으면 됐다. 그럼 내가 여기에 발을 디디면 영희 언니가 돈을 벌겠구나. 그리고 영희 언니는 영희 언니 위에 있는 사람의 주머니에 돈을 넣어 주겠지.
두 사람의 강연이 끝나고 쉬는 시간이 되자 몇 명이 소리를 지르며 나갔다.
“네가 친구냐?”
“이러려고 나 데리고 왔어?”
다시 강연이 시작되었다. 내용은 비슷했다. 강연이 끝나자 또 몇 명이 소리를 지르며 나갔다. 한 명은 뺨을 맞기도 했다.
“수지야, 어땠어? 감동적이지. 너도 저렇게 되고 싶지 않아?”
영희 언니는 소리를 지르고 욕을 하며 나간 사람들을 보고서도 평온한 미소를 띠고서 내게 물었다. 돈 때문에 아는 사람들을 팔아먹는 직업을 꿈꿔야 하는 이유는 뭘까.
“언니, 이거 다단계 맞는 것 같은데요? 그리고 전에 저한테 의류 회사 다닌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거기보다 여기가 더 좋아서 얼마 전에 옮긴 거야. 이거 다단계 아니야. 네트워크 마케팅이라고, 요즘 새로 나온 비즈니스 모델인데, 다단계라니. 너 내가 너한테 그런 거 시킬 사람으로 보여?”
언니의 말이 모두 거짓말처럼 들렸다. 그러나 사람을 함부로 의심하면 안 된다. 사람을 의심하기 시작하면 세상에는 믿을 수 있는 사람이 없다. 사랑도, 우정도, 진실도, 거짓말도, 그 어느 것도 믿을 수 없다. 나는 내가 거짓말을 하지 않는 것처럼 남들도 거짓말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다.
언니가 내게 거짓말을 해야 하는 이유가 있다면 그건 뭘까. 설마 돈 때문에 나한테 이런 거짓말을 한다는 말일까? 겨우 돈 때문에 나를 만나고 2년 동안이나 돈줄로서 관리하고 여기까지 불러서 거짓말까지 한다는 말일까? 그렇다면 언니는 너무나도 무서운 사람이고 내가 견딜 수 없는 사람이었다. 나는 언니의 말을 믿기로 했다.
“지금부터는 우리 같이 있어야 하니까, 일단 네 짐부터 여기로 옮기자. 어차피 조만간 방 뺀다며?”
“네, 짐은 대충 꾸려 놓긴 했는데.”
회사에는 사람이 많았지만 내가 짐을 들고 오는 걸 도와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나는 학교 앞 고시원에서 회사 근처 숙소까지 환승을 세 번이나 하면서 낑낑거리며 짐을 옮겼다.
회사 사람 몇몇이 함께 살고 있다는 방은 시장 근처 주택가의 반지하방이었는데, 곰팡이 냄새가 약간 나는 음침한 느낌의 방이었다. 구석에는 가방과 상자 따위가 쌓여 있었고, 반쯤 열린 창문 사이로 지나가는 사람들의 발이 보였다.
출근이라고 해야 할까. 정식으로 회사에 간 첫날부터 나는 영희 언니와 함께 사무실로 불려갔다. 부장인지 과장인지 하는 남자가 계약서를 들고 와 설명을 하며 사인을 하라고 했다.
“수지야, 같이 한 번 해 보자. 응?”
“사업 설명은 어제 자세히 들었죠?”
“네, 근데 이거 아무래도 다단계 같은데요.”
남자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다단계라뇨, 우리 그런 불법적인 단체 아니에요. 엄연히 법적으로 등록도 다 돼 있는 회사라고요.”
내 옆에서 함께 설명을 듣던 예쁘장한 여자는 다단계라는 단어를 입에 올리는 나를 이상한 눈빛으로 쳐다보다가 남자의 말을 듣더니 자기는 사인을 하겠다고 했다.
“저 요즘 학자금 대출 때문에 너무 힘든데, 휴학하고 이거 몇 달만 하면 4년 학비 벌 수 있다고 그래서, 맞죠?”
저런 말을 진심으로 믿는 머리로 학자금 대출을 받아 학교를 다녀 봤자 뭘 하냐는 생각이 들었지만 나는 타인을 마음 편히 바보로 여길 수 있을만큼 잘난 인간이 아니었다. 나도 학교를 계속 다녀 봤자 뭘 할 수 있을지 몰랐다.
예쁘장한 여자가 들뜬 표정으로 사인을 했다.
“수지 씨도 그냥 여기 사인만 하시면 돼요. 뭐가 그렇게 어려워요.”
“저는, 아무래도 안 되겠어요.”
“수지야, 너 왜 그래?”
남자의 미간이 또 찌푸려졌다.
“영희 씨, 좀 가만히 있어 봐요.”
언니가 허리를 바로 펴며 억지로 웃어 보였다.
“수지 씨, 우리 그럼 이렇게 할까요? 원래 교육 받고 여기 있고 하려면 기본금을 내야 해요. 물론 그건 우리가 대출해 주는 거예요. 수지 씨는 지금 뭐 대출 받을 만한 담보나 그런 게 없으니까 계약서에 사인만 하면 회사에서 그런 건 알아서 다 해 줘요. 복잡할 거 하나도 없어. 근데 수지 씨는 특별히 대출 없이 그냥 일주일만 있어 보는 걸로 할게요. 그러고 나서 결정하면 어때요?”
기본금이라, 그러고 보니 아까 그 예쁘장한 여자가 옆 테이블에서 대출에 대한 설명을 듣고 있었다.
“수지야, 이거 진짜 완전 좋은 기회야. 원래 다 교육비 내고 하는 건데, 너한테는 공짜로 해 주신다잖아.”
“근데 이거 제가 나중에 갚아야 하는 거 아니에요?”
“수지 씨, 걱정하지 마요. 안 받을게요. 일단 있어 봐요.”
일단 있기로 했다. 첫날 저녁으로는 아귀찜을 먹었다. 여기 오기 전에 만났던 언니의 동료들과 언니가 사 주었다. 그들은 밥을 먹는 내내 그들의 꿈에 대해 이야기했다.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더 많은 사람의 도움이 필요하고, 모두 더불어 살아가야 한다고 말했다.
아귀찜을 먹고 나오며 편의점에 들러 음료를 하나씩 샀다. 근처 공원에 앉아 음료를 마셨다. 얘기는 되풀이되었다. 공원에는 비둘기가 많았다. 비둘기들은 날개가 있는데도 멀리 날아가지 않고 나무 그늘 아래를 걷기만 했다. 가끔 날아오르기도 했지만 잠깐이었다. 날지 않는 비둘기들은 정체 모를 회색빛 덩어리처럼 보였다. 나는 길을 걷다 문득 비둘기가 되는 꿈을 꾸고는 했다. 가파른 언덕길을 오르거나 저 멀리까지 펼쳐진 바다를 볼 때면 눈앞이 아련해지며 깃털이 돋아나 비둘기가 되는 꿈을 꾸었다.
이튿날, 아침부터 준비하고 회사로 가야 했다. 영희 언니가 옆에서 늦었다며 재촉을 해 급히 옷을 갈아입으려 하는데 갑자기 전화가 왔다.
“여보세요.”
나는 전화를 받기 위해 집 밖으로 나가려 했다.
“수지야, 어디 가니?”
“전화가 와서, 잠시만요.”
“수지야, 같이 가자.”
내가 전화를 받는데 언니가 왜 같이 간단 말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은 딱 하나였다. 이게 다단계라는 걸 인정하는 것. 강연 내용, 사무실 분위기, 이런 단체 생활 등 인터넷 매체 등에서 접한 다단계와 모든 게 같았다. 그러나 언니가 정말 그런 사람일까. 나한테 여태껏 딱히 잘해 준 건 없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돈 때문에 나를 만났고 이제는 전화 받는 데 쫓아오기까지 하는 그런 사람일까.
언니의 눈치를 보며 통화를 짧게 끝냈다.
“근데 왜 전화 받는 데까지 따라오세요?”
“아, 우리는 단체 업무라서, 다른 사람들하고 단체 활동을 해야 하거든.”
회사에서 언니는 내가 화장실에 갈 때도 따라왔다. 나는 다른 사람이 있으면 긴장해서 소변이 나오지 않는다고 말했는데도 언니는 나가지 않았다.
“그럼 너 볼일 보는 동안 계속 손 씻고 있을게.”
두 번째 저녁은 왕돈가스였다. 고기가 질겼지만 김치 옆에 놓인 통조림 파인애플은 달고 달았다.
사흘째 아침은 컵라면이었다.
“수지야, 우리가 돈이 그렇게 많지가 않거든. 우리는 이제 시작하는 단계라서. 그래서 아껴야 해. 꿈을 위한 거니까, 우리끼리 컵라면만 먹어도 맛있어. 그렇지?”
며칠 지내면서 이야기를 나눠 본 회사 사람들 중 오갈 데가 없어서 여기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들의 말대로라면 모두 화목한 가정에서 자라났으며 고향에 집이 있고 부모가 있고 형제가 있는 사람들이었다. 통장에 돈도 어느 정도 있었다. 단지 BMW를 아무렇지 않게 살 만한 큰돈이 없는 것뿐.
“그런데 이거, 다른 사람을 이용해서 돈 버는 거 아니에요?”
“수지야, 내가 며칠 가만히 있었는데 너 첫날부터 지금까지 진짜 말 이상하게 한다. 이용이 아니라 같이 성장해 가는 거지. 꿈을 위해서.”
한 명이 성장하려면 다른 한 명의 피를 빨아야만 하는 게 동반 성장이라는 말은 태어나서 처음 들었다. 여기가 이상한 게 아니라면 세상이라는 게 원래 이런 곳일까.
부장인지 과장인지 하는 남자는 일주일의 여유를 준다고 하고서는 날 볼 때마다 계약서 언제 쓸 거냐고 독촉을 해 댔다.
“대출이랑 뭐 이런저런 것들에 동의하는 계약서인데, 내가 계속 설명했잖아요. 수지 씨, 뭐가 그렇게 문제예요?”
“저는 남의 돈 빌려서 뭘 하고 싶은 생각이 없어요.”
“아, 수지 씨 그렇게 안 봤는데 참 답답한 사람이네. 남의 돈은 무슨 남의 돈이에요, 성공해서 갚으면 되는데. 남의 돈이 다 내 돈 되고 그런 거예요.”
“수지야, 너 부모님한테 효도하고 싶고 그렇지 않아? 돈 벌어서 외제차도 사 드리고, 너 하고 싶은 것도 하고.”
외제차 사 드리는 게 효도라는 말도 23년 살면서 처음 들어봤다. 남을 이용해서 번 돈으로 외제차 사 드리고 효도했다며 좋아하는 자식이나, 그걸 받고 좋아하는 부모나 모두 멀쩡한 인간은 아닐 것 같았다.
“더 생각해 볼게요.”
남자가 또 미간을 찌푸렸다.
저녁에도 컵라면을 먹었다.
“수지야, 너 이것도 하나 먹을래?”
언니가 웃으면서 고구마 만쥬를 하나 건넸다.
“우리끼리 있을 때는 원래 이런 거 안 먹는데, 전에 보니까 네가 이거 좋아하는 것 같아서 특별히 사 주는 거야.”
“잘 먹을게요.”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했다. 남이 자신의 돈을 털어 사 주는 거니까. 어떤 목적이 있든 없든.
여기 와서 나는 하는 것도 없이 얻어먹기만 하고 있었다. 아침이면 사무실에 갔다가 낮에는 언니, 언니의 동료들과 골목을 헤맸다. 우리는 그냥 얘기를 하고, 또 얘기를 했다. 나라는 인간이 누군가와 그저 얘기를 하는 것이 컵라면을 얻어먹을 정도의 가치가 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보통의 경우라면 1시간 동안 힘들게 일해도 겨우 몇 천 원을 손에 쥘 뿐인데, 가만히 얘기를 듣고 있는 건 어느 정도의 가치가 있는 것일까.
“수지 씨, 난 수지 씨 처음 봤을 때부터 참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왜 우리랑 같이 안 하려고 해요?”
“그래, 수지야. 다들 너 괜찮게 보고 있는데.”
고마워해야 하는 걸까. 아마도 그렇겠지. 잘 알지도 못 하는 나라는 사람을 괜찮게 봐 준다는 걸.
편의점에서 컵라면을 먹고 돌아가는 길에 언니가 만화책을 보고 싶다고 했다. 숙소를 함께 쓰는 사람들끼리 우르르 만화 대여점에 갔다. 언니는 만화책을 쭉 둘러봤다.
“이거 신간 나왔네.”
언니는 가만히 서서 책을 촤르륵 넘겼다.
‘대여료 300원’
입구에 붙어 있는 큰 종이에 대여 금액이 나와 있었다.
“그냥 다음에 볼래.”
“안녕히 계세요.”
대여점 아저씨는 말이 없었다. 우리는 빈손으로 컴컴한 어둠 속에서 가로등 불빛을 따라 숙소로 돌아왔다.
뒤척거렸다. 잠이 오지 않아 뒤척거렸다.
“수지야, 안 자?”
영희 언니의 동료인 지혜 언니가 속삭였다. 지혜 언니는 회사에 와 보기 전에 영희 언니가 소개해 준 사람이었지만 여기 온 뒤 따로 얘기할 틈이 있었던 건 아니었기에 모여서 밥을 먹을 때 잠깐 얼굴이나 볼 뿐, 어색한 사이였다.
“우리 잠깐 산책이나 할까?”
나는 지혜 언니와 둘이서 밖으로 나왔다. 별도 없는 흐린 하늘은 컴컴하기만 했고 주택들 사이로 이어진 골목길에는 아무도 없었다.
“너 담배 피워?”
지혜 언니가 담배 피우는 건 처음 보았다.
“아뇨.”
내 대답을 들은 언니는 내게서 약간 떨어져 쪼그리고 앉아 얼마간 담배를 피우고, 길바닥에 비벼 불을 끈 후 어느 집 앞 쓰레기봉투에 넣었다.
“넌 왜 이거 안 하려고 해?”
“하기 싫어서요.”
“돈 벌기 싫어?”
“돈은 벌고 싶은데, 이런 식으로는 싫어요.”
“다단계 같아서?”
언니가 웃었다.
“네.”
“나도 처음엔 그런 줄 알았는데, 해 보니까 아니야.”
“해 보니까 어떠신데요?”
“내가 직접 해 보니까 듣기만 했던 거랑은 달라. 내가 직접 물건을 사서 판매도 하고, 그냥 내 사업 하는 느낌이랄까? 되게 괜찮아.”
그러고 보니 방구석에 있던 상자에 치약, 음료 따위의 이미지가 찍혀 있었던 것 같았다.
“뭐해?”
순간 닭살이 확 올라왔다. 영희 언니였다.
“자다 보니까 없어서 나왔어.”
지혜 언니도 영희 언니가 데리고 왔다고 했던 기억이 났다.
‘영희에게 얼마나 고마운지 몰라요. 지혜도 나도 영희가 소개해 줘서 여기 알게 됐거든요.’
술집 사장이었다는 남자가 웃으며 말했었다.
“그냥, 잠이 안 와서 수지랑 얘기 좀 하고 있었어.”
“아, 그래, 무슨 얘기?”
“그냥 이런저런, 인생 얘기. 아, 이제 졸리다.”
지혜 언니가 웃었다. 영희 언니도 웃었다. 어둠 속에서 어느 한 쪽의 웃음이 참 씁쓸한 느낌이 들었는데, 그게 어느 쪽인지는 알 수 없었다.
나흘째 아침에는 셋 다 늦잠을 잤다. 사무실에 들러서 인사를 하고 편의점에 가려는데 부장인지 과장인지 모를 남자가 말을 걸었다.
“수지 씨, 그리고 오늘은 사장님하고 저녁에 식사 같이 하기로 해 놨는데, 괜찮죠?”
“어머, 사장님요?”
영희 언니가 손을 맞잡으며 호들갑을 떨었다.
“수지야, 너 사장님 얘기 못 들어봤지. 엄청 멋진 분이야.”
사장님과의 저녁식사는 시장 변두리에 있는 허름한 호프집에서 이뤄졌다. 언니의 말에 따르면 사장님은 심심하면 해외여행을 다니고 돈이 너무 많아 매일 쓰기만 한다는데 그런 분이 왜 이런 데서 저녁을 드시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수지 씨, 얘기 많이 들었어요. 전부터 영희가 수지 씨 얘기 많이 하더라고. 착하고 꿈 많은 사람이라고.”
“아, 언니가 그러던가요?”
언니는 활짝 웃는 표정으로 사장님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왜 우리 사업을 안 하려고 해? 그렇게 꿈 많은 사람이.”
“네?”
“수지 씨 꿈을 이룰 수 있는 좋은 기횐데 왜 안 하려고 하냐고.”
“저는 돈 많이 버는 게 꿈이 아닌데요.”
“돈?”
“여기서 다들 돈 얘기밖에 안 하시던데.”
사장님이 땅콩 한 알을 씹었다.
“돈이 중요한 게 아니야. 우리가 말하는 건 꿈이에요.”
“여기서 말하는 꿈은 돈인 것 같던데요.”
“수지 씨 참 말귀를 못 알아듣는구나.”
말귀를 못 알아듣는다. 이런 말을 들은 후에는 늘 얻어맞거나 욕을 들었던 기억이 났다. 지금 박차고 나가야 할까. 그럼 언니는 어떻게 될까. 다른 사람까지 망쳐 버릴 수는 없었다. 심장이 두근거렸다. 마음이 아파지려고 할 때는 몸을 극도로 아프게 해야 마음이 보호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나는 손톱으로 팔뚝을 꾹 누르며 긁었다.
“내가 어떻게 사는지 알아? 낮에는 갤러리에서 전시 보고, 그림도 사고, 인디 밴드들하고 문화적으로 소통도 하고, 친분도 맺고. 심심하면 해외여행도 다니고 그러면서 여유롭게 살아. 수지 씨 지금 어때?”
나는 도록을 산 적은 있지만 그림을 산 적은 없고 밴드 공연을 보러 간 적은 있지만 밴드와 친분은 없고 가이드북 보는 걸 좋아하지만 해외여행을 한 적은 없다.
“나쁘지 않다고 생각해요. 돈은 별로 없지만.”
“수지 씨 참 재미있는 사람이네. 돈이 없는데 어떻게 나쁘지 않을 수가 있어? 바보야?”
사장님이 맥주를 들이켰다. 국산 맥주, 500cc.
“수지 씨 할 줄 아는 게 뭐 있어? 지금까지 해 본 건?”
“지금 대학 다니고 있고요. 이런저런 알바는 많이 해 봤어요.”
“지금 대학생이면 요즘 취업하기가 얼마나 힘든 줄 알겠네. 스펙 좋고 집안 빵빵한 애들이나 좋은 데 취업하는 게 요즘 세상이야.”
나는 좋은 스펙이나 백을 가져 본 적이 없었다.
“뭐라도 하고 살겠죠.”
나는 내가 뭘 해야 할지, 뭘 할 수 있을지 몰랐다. 그렇지만 눈앞에 있는 사장님처럼 되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런 생각으로 뭘 할 수 있는데? 수지 씨가 솔직히 예쁜 얼굴은 아니잖아? 몸매도 그저 그렇고. 대학도 인서울이긴 해도 손꼽히는 명문대는 아니잖아?”
팔에서 피가 조금씩 나기 시작했다. 언니는 맥주를 들이켜며 웃고 있었다. 충고랍시고 비난을 내뱉던 사람들이 생각났다. 그 사람들은 하나같이 내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아이라고 말했다. 자기들이 말하는 대로 해야 한다고 했다. 얼굴을 고치거나 남들이 하는 일을 따라 하거나 재밌지 않아도 억지로 웃거나 단순히 자기 지시에 따르거나 하는 따위의 일들을 주문하며 그대로 따라야만 내가 다른 사람들처럼 잘살 수 있다고 했다.
“요즘 얼굴 후지면 서류에서 떨어지고 몸매 후지면 면접에서 떨어지는 거 몰라?”
사장님은 선글라스를 쓰고 있어 눈이 보이지 않았다. 어떤 눈빛을 하고 있는지 보고 싶었다. 어떤 눈빛을 지니고 있어야 저런 말을 아무렇지 않게 내뱉을 수 있는 건지 알고 싶었다.
“너 같은 애들이 졸업해 봤자 뭘 할 수 있을 것 같아?”
춥고 가슴이 시렸다. 반박하고 싶었지만 내가 뭘 할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편의점 아르바이트라면 다시 할 수 있을까. 요즘은 그것도 경쟁률이 높았다.
“창녀밖에 할 수 있는 게 없어.”
사장님이 맥주를 바닥까지 쭉 들이켰다.
“수지 씨 같은 사람은 우리 일 안 하면, 창녀밖에 할 수 있는 게 없다고.”
피가 흘러내렸다. 흘러넘쳤다. 다른 사람 주머니를 털어서 내 주머니를 채우느니 내 몸을 팔아 돈을 버는 게 낫겠다는 말은 할 수 없었다. 그나저나 사장님 말대로라면 난 예쁘지도 않고 날씬하지도 않은데, 내 몸을 사려는 사람이 있기나 할까. 사장님이 날 너무 과대평가하고 있는 건지도.
“수지야, 사장님 말 잘 들었지? 내일 계약서 쓰자.”
언니가 웃으면서 내 등을 두드렸다.
“건배!”
언니가 내 잔에 자기 잔을 부딪치며 웃었다.
다섯째 날 아침에도 컵라면을 먹었다.
“해장도 되고 좋네.”
영희 언니가 웃었다.
“어제 사장님하고 얘기 잘했어? 그 분 멋있지.”
지혜 언니가 컵라면을 국물까지 다 먹고서는 웃으면서 말했다. 간호사를 하다가 이 일을 안 후 외국에 가는 꿈을 꾸게 됐다는 지혜 언니는 열심히 돈을 벌어 외국에 가서 살 거라고 했다. 간호사였기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지혜 언니는 언제나 상냥했고 잘 웃었다.
“수지 씨, 계약서 안 쓸 거예요?”
“일주일만 있어 보라고 하셨잖아요. 아직 일주일 안 됐어요.”
계약서 쓰라고 강요하는 것 말고는 하는 일이 없어 보이는 남자의 미간이 또 찌푸려졌다. 영희 언니도 따라 인상을 썼다.
“같이 들어온 사람들은 벌써 교육 다 받고 사업 시작했는데 수지 씨 혼자 이렇게 뒤처져 있어서야 되겠어요?”
나는 여기서도 뒤처져 있는 모양이었다.
“영희 씨가 신경 좀 써.”
누군가 내 앞에서 저렇게 말하면, 내가 신경쓰임을 당해 줘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독설을 하든 배려를 하든 나를 신경써 주는 사람의 마음을 상하게 하지 않으려면 나는 그 사람의 뜻대로 움직이는 착한 아이여야 했다.
“그리고 영희 씨, 이거 챙겨 가.”
남자가 ‘건강 음료’라고 전면에 크게 써 있는 상자를 영희 언니에게 내밀었다. 언니는 상자를 받기 전 종이에 사인을 하고, 상자를 뜯어 내게 음료가 담긴 팩을 하나 내밀었다.
“마셔 봐, 맛있어. 몸에도 좋대.”
저녁에는 회사 근처 분식집에서 떡볶이를 먹었다.
“여기 떡볶이 맛있지. 가끔 와서 먹는데 너무 맛있어.”
“아, 네, 맛있네요.”
빨간 밀가루 떡볶이에서는 조미료 맛이 잔뜩 났지만 언니의 웃는 얼굴을 보면서 맛없다는 말은 할 수가 없었다.
“내가 너한테 밥 사 주고 이런 거 다 내 주머니에서 나가는 거야. 벌써 며칠이나 됐어. 공짜라고 생각하면 안 돼. 알지?”
나는 언제나 사람들을 믿으려고 했는데, 사람들은 자꾸 내가 그들을 믿을 수 없게 되는 어두운 방으로 끌고 갔다. 눈을 가리고 입을 막고 거짓말만을 들려주었다. 가끔 진실을 이야기하면 그게 더 거짓말 같았다.
‘언니, 여태껏 언니가 저한테 얻어먹은 밥값이랑 저희 부모님이 드렸던 여비로 컵라면을 백 개는 넘게 살 수 있어요.’라고 나는 생각했다. 물론 말은 하지 못 했다. 이런 말을 하는 건 예의가 아니니까.
숙소 앞에 도착하니 지혜 언니가 숙소 옆 골목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왜 이제 와?”
“아, 떡볶이 먹고 오느라고.”
“저번에 갔던 거기? 맛있었겠다.”
“언니는 저녁 뭐 드셨어요?”
“나? 난 왕뚜껑.”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아닌 것 같아. 모두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걸 받아들이지 않으면 내가 미쳐 버릴 거야. 거짓말이 아니라고 해도, 이건 싫어.
“언니, 저 안 할래요.”
영희 언니의 표정이 싸늘하게 굳어졌다. 지혜 언니는 약간 씁쓸한, 그러나 착해 보이는 미소를 지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아닌 것 같아요. 그냥 집에 갈래요.”
“수지야, 너 여기서 관두면 평생 아무것도 못 해. 네가 다른 데 가서 다른 일은 할 수 있을 것 같아?”
“다른 일 못 해도 괜찮아요. 이건 아니에요.”
“야! 내가 너한테 어떻게 해 줬는데!”
영희 언니가 2년 만에 처음으로 소리를 질렀다. 처음으로 날 죽일 듯이 째려보았다.
“지혜야, 얘 간댄다.”
지혜 언니는 대답하지 않았다. 움직이지도 않았다. 나는 방으로 들어가 황급히 짐을 챙겨 나왔다. 영희 언니가 날 때릴 것만 같았지만 그런 일은 없었다. 언니는 그저 마지막까지 날 째려보기만 했다. 지혜 언니는 그 뒤에서 슬픈 표정을 지으며 손을 흔들어 주었다.
나는 뛰었다. 크고 무거운 가방을 양손에 들고 지하철역까지 혼자 뛰었다. 뒤따라오는 사람이 없나 가끔 뒤를 돌아보았지만 아무도 따라오지 않았다. 털썩, 바닥으로 가방이 떨어졌다. 긴장한 탓에 손의 힘이 풀린 걸까. 뒤돌아보니 회색 깃털이 바람에 실려 날아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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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쓰려고 놔뒀었는데 더 쓰지 않았던... 한 십 년 전에 쓴 것 같은 글.



그 여자, 고양이를 좋아하는 것 같다.
담배를 피우러 옥상에 나갔다가 그 여자가 쪼그리고 앉아 고양이를 쓰다듬고 있는 모습을 본 적이 있다.
누렇고 뚱뚱한 고양이였다.
나랑 비슷하다. 누렇고 뚱뚱한.
내 피부가 누런 건 황인종인데다 선크림을 안 바르기 때문이고 내 이가 누런 건 골초이기 때문이고 내 배가 나온 건 밤마다 라면을 먹고 자기 때문이다.
그 고양이가 누런 것도 태어날 때부터 정해져 있던 것일 테고, 뚱뚱한 건, 글쎄. 그 여자가 뭔가 먹을 걸 주는 모습은 아직 본 적이 없어 녀석이 뭘 먹는지 모르겠다. 고양이가 뭘 먹고 사는지 난 잘 모른다. 설마 쥐를 먹지는 않겠지.
누뚱이(편의상 내가 붙인 이름이다. 발음에 주의하지 않으면 늦둥이처럼 들린다.)는 평소에는 집에 들어가 잠만 자는지 꼬리도 보이지 않는다. 옥상 구석에는 녀석의 집과 밥그릇이 덩그러니 놓여 있고 가끔 그녀의 빨래가 바람에 가벼이 나부낄 때면 꽤 괜찮은 풍경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녀의 옥상과 나의 옥상은 꽤나 가까워 옥상에 그녀가 있으면 난 언제나 다른 곳을 보며 담배를 피운다. 그녀도 아마 담배 피우는 남자를 싫어하겠지. 싫어하진 않더라도 어쨌거나 좋아하는 여자는 별로 없으니까. 그렇지만 그녀와 내가 가까워질 확률은 잘 모르겠고 내가 담배와 멀어질 확률은 아주 낮으므로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가끔 누뚱이 혼자서 옥상을 어슬렁거리고 있을 때는 누뚱이를 바라보며 담배를 피우기도 하는데 연기가 바람을 타고 그쪽으로 넘어갈 때면 녀석은 흠칫 놀라곤 한다. 처음에는 내가 문을 열고 나타나기만 해도 눈을 동그랗게 뜨며 집으로 뛰어들어가던 녀석이었는데, 이제 익숙해졌는지 별로 신경도 안 쓰는 듯하다. 아니면 내가 자기와 비슷한 부류라는 걸 알아차렸는지도 모르지.
햇살 좋은 봄날에 하릴없이 옥상에서 어슬렁거리는 누렇고 뚱뚱한 존재.
이렇게나 비슷한데 왜 녀석은 귀여움을 받고 나는 아닌 것일까. 기이한 일이다.

옥상에 널어 뒀던 빨래에 또 담배 냄새가 배 있다.
옆집 남자 때문인 것 같다. 내가 옥상에 올라가면 나름 구석에 가서 피우긴 하던데, 내가 안 보이면 그냥 돌아다니면서 피우겠지.
사람이 넘어올 수 있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를 담배 연기가 못 넘어올 리 없다. 혹시 우리 집 옥상에서 피우는 건 아닐까 싶기도 하다. 누렁이의 털이 갈수록 더 누래지는 게 그 사람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하루이틀도 아니고 탈취제를 뿌리는 것도 귀찮다. 누가 웬 담배 냄새냐고 하면 남자친구가 담배 피우면서 빨래를 널어서 그렇다고 말해야지. 사람들은 의외로 '이걸 믿어?' 싶은 것들을 믿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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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에 쓴 글.



모닝콜 소리에 눈을 떴다. 반쯤 들어오다 마는 햇살에 눈이 따갑다. 기지개를 켜며 꿈지럭거리다 리처드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의 두꺼운 책등에 머리를 찧었다.

"기도합시다."
기도손을 하고 눈을 감았다. 눈을 감으니 다른 감각들이 곤두선다. 좋은 향기가 난다. 2의 긴 머리를 휘감고 있는 체리 향 샴푸 냄새.
교회 뒤에 자리한 널찍한 마당에 다 같이 모여 국수를 먹으며 크리스마스 트리를 어떻게 꾸밀 것인가에 대해 논의했다. 크리스마스가 며칠 남지 않았다. 내 생일도 못 챙기는 주제에 남의 생일을 챙길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지만 어쨌거나.
국수를 다 먹고 그릇을 갖다 놓으러 갔는데 집사인지 장로인지 하는 아저씨가 십일조는 언제부터 낼 거냐고 묻는다.
"얘는 아직 제가 전도 중이에요."
2가 집사인지 장로인지 하는 아저씨를 향해 웃어 보이며 보이지 않게 내 등을 떠민다. 엉거주춤 움직이는 내게 2가 귓속말로 천천히 내도 된다고 속삭였다.
"천국 가면 다 돌려받는 거긴 한데, 너는 아직 안 내도 돼."
"으응, 그렇구나."
"1아, 나는 네가, 정말, 음, 정말 구원 받아서 나랑 같이 천국 갔음 좋겠어."
"아, 그래, 정말, 고마워."
'지금 당장 같이 가자고 해도 갈 수 있니?'라고, 혼자 생각만, 했다.
"십일조는 네가 정말 내고 싶을 때, 그때 내면 돼."

일요일 아르바이트까지 빼고 교회에 나가게 된 건 2의 전도 때문이었다. 아니, 전도한 2 때문이었다.
셔터를 내린 가게 안에서 나는 걸레질을 하고 2는 돈을 세고 있었다. 잘 지워지지 않는 자국이 있어 박박 걸레질을 하다 팔이 아파 눈을 감으니 체리 향 샴푸 냄새가 났다.
"너 내일 뭐해?"
종소리에 침을 질질 흘리는 파블로프의 개처럼, 2의 목소리만으로 손끝이 저려 왔다.
"내일 출근해야지."
2가 머리를 뒤로 젖히며 까르르 웃었다.
"내일부터 여름휴가잖아. 5일 동안."
나는 잠깐 멍하니 서서 이달의 날짜들을 계산했다.
"딱히 할 거 없겠네, 그럼. 너 나랑 우리 교회 갈래?"
"교회?"
난 교회도 성당도 하나님도 하느님도 좋아하지 않는다고, 그의 아들과 며느리도 좋아하지 않는다고 덧붙이고 싶었으나 2의 기분을 상하게 하고 싶지 않았기에 입을 다물었다.
나는 2의 근처로 발걸음을 옮겨 더럽지도 않은 카운터 위를 닦았다. 그녀의 포니테일에서 나는 냄새에 걸레를 쥔 손이 간질거렸다. 2의 머리카락을 만지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지만, 용서받기 힘든 충동만 느끼며 살아온 나는 저지르기보다 억누르는 데 익숙한 인간이다. 살짝 통통한 손가락으로 터치 스크린을 꾹꾹 누르며 정산을 마무리하는 2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2가 고개를 돌릴 기미가 보이자마자 다시 걸레질에 집중했다.
"1아, 나는 네가 구원 받았으면 좋겠어. 그래서 나랑 같이 천국 갔음 좋겠어."
"천국?"
그딴 게 있다고 믿는 인간들의 머릿속이 궁금하다는 말이 목구멍을 찔러 댔지만, 침을 꿀꺽 삼키며 그 말도 함께 넘겨 버렸다.
"학교에서도 여기에서도, 그냥 널 볼 때마다 그런 생각이 들었어."
"학교에서 날 봤다고?"
"늘 같은 시간에 같은 일을 하고 있으니까. 전공실 갈 때마다 자판기 청소하고 있고, 책 빌리러 갈 때마다 책 정리하고 있으니까."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이렇게 여기 서 있을 수 없으니까.
"그랬구나, 아는 척하지 그랬어."
"바빠 보여서. 널 볼 때마다 바빠 보이고, 지쳐 보여서. 그리고 나랑 아르바이트도 같이 하는데 늘 바쁘니까, 일 끝나고 같이 커피라도 마시자거나 하기도 그렇고."
돼지국밥보다 비싼 커피 같은 건, 사 마실 돈도 없어.
"아, 요즘 좀 바쁘긴 했어."
"아무튼, 그래서. 뭐랄까, 마음이 평화로워질 수 있는 곳을 알려 주고 싶어서, 그래서."
"어, 근데 나는 종교 같은 거 안 믿는데."
2의 눈망울이 흔들거리며 침을 꼴깍 삼키는 게 보였다.
"사실, 며칠 전에 네가 학생식당 구석에서 울면서 밥 먹는 걸 봤거든."
망할.
울면서 밥을 먹었던 건, 순전히 돈 때문이었다.
백반이 지긋지긋해서 뚝배기 불고기 정식을 먹고 싶었는데, 딱 100원이 모자랐다. 어제 방세를 내 버려서 통장에도 돈이 없는데, 통장 잔고를 몇 번이고 계산했지만 카드를 긁을 수 없었다. 나는 할 수 없이 백반을 주문했는데, 하얀 주방모자를 쓴 아주머니가 '달걀후라이 소진'이라고 적힌 종이를 백반 받는 곳 앞에 붙이고 있었다.
하루 한 번 먹는 식사인데 100원이 모자라 제일 싼 메뉴를 먹어야 하고, 시간을 못 맞춰 달걀도 못 먹게 됐다는 사실에 갑자기 머리가 뜨거워지며 눈물이 왈칵 솟았다. 콧물을 훌쩍거리며 휴지를 몇 장 뽑아 식당 제일 구석으로 향했다. 조용히 콧물을 닦으며 밥을 먹었다. 한 숟가락 퍼 넣을 때마다 눈물이 한 방울씩 흘러내렸다. 콧물을 닦았던 휴지를 조심스레 접어 눈물도 닦았다.
머릿속으로 빠르게 영상이 재생되며 얼굴이 화끈거렸다. 나는 다시 고개를 숙이고 걸레질에 집중했다. 2가 계산대 서랍을 밀어넣는 소리가 들렸다.
"다음부턴 혼자 밥 먹지 말고 나랑 같이 먹자."
"어, 시간이 맞으면, 그러자."
"내일 딱히 할 거 없으면 교회도 같이 갔으면 좋겠는데."
"아, 근데 좀, 피곤해서."
"종일 있는 거 아니고 그냥 아침 예배만 같이 보고 가면 괜찮지 않을까? 난 네가 정말 구원 받아서 행복해졌음 좋겠어."
그리고 벌써 반년째, 나는 2와 함께 교회에 다니고 있다. 자신을 믿어야만 천국에 들어올 수 있게 해 준다는 치사하고 이기적인 신을 내가 믿게 될 리 없지만.
내가 믿는 건 2에게서 나는 향기, 그녀의 솜털 같은 목소리와 속삭이는 발걸음 소리 같은 것들.
"자, 옆 사람과 손을 잡고, 함께 노래 부릅시다."
언제나 나를 자기 옆에 앉히는 2의 손을 잡고 노래를 부른다. 몇 번을 불러도 가사가 외워지지 않는 노래를 열심히 부른다. 2의 손가락 사이사이를 꼼지락거리고 싶다는 충동이 일 때마다 눈을 꼭 감고 더 크게 노래를 부른다. 당연하게도, 가사를 틀린다. 내가 가사를 틀릴 때마다 2는 노래를 부르다 말고 까르르 웃는다.
교회 앞마당에 세워진 커다란 트리가 나를 내려다본다. 어두운 밤하늘로 치솟은 커다란 금색 별 하나.
"크리스마스 예배도 같이 올 거지?"
나를 올려다보는 2의 새까맣고 촉촉한 눈동자를 보면, 뭐든 그녀가 하자는 대로 맞춰 주고 싶어진다. 그렇지만 그녀가 나를 먹여살려 줄 건 아니니까.
"그날은 일해야 해. 전날에도 일해야 하고."
2는 개강 후 아르바이트를 관뒀다.
"크리스마스 즈음에는 다른 애들이 다 일하기 싫다고 해서, 사장도 일하기 싫다고 하고. 원래 사장이 아침조잖아. 그때부터 마감까지 쭉 하면 시급 더 쳐 준다고 하더라고."
"같이 열심히 준비했는데, 트리도 꾸미고 선물도 만들고."
"그래도 일해야 하니까, 어쩔 수 없어."
2는 시무룩해질 때면 오른쪽 볼에 바람을 넣는다. 잘 부푼 풍선껌 같다. 콕 찔러 터트려 버리고 싶다.
"다른 사람들이랑 재밌게 놀아. 나도 일 끝나고 시간 봐서 연락하든가 할게."
교회 앞에서 헤어진다. 2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는데 2가 고개를 돌려 손을 흔든다. 나도 손을 흔들고, 뒤돌아선다.
이틀치 일당을 평소보다 더 쳐 준다고 해도, 십일조를 낼 돈 같은 건 없다. 장학금을 받아도, 아르바이트를 해도, 보증금 없는 옥탑방에 살아도, 하루에 한끼만 먹어도 왜인지 늘 돈이 부족하다. 다시 고시원에 들어가야 하나. 고시원에 들어간다 해도 아낄 수 있는 건 전기세, 물세 정도다. 맛없는 밥과 김치만 먹는 생활을 반복하면 밥값도 아낄 수 있겠지만.

휴대전화를 켰다. 잠에 찌든 근시안은 큰 숫자밖에 읽지 못한다. 오전 8시라는 건지 오후 8시라는 건지 모르겠다. 눈을 쓱쓱 비비고 다시 화면을 들여다봤다. 오후 8시다. 오전 아르바이트 후 나도 모르게 잠들어 버렸는데, 5시간이나 자 버렸다. 또 밤새겠군, 작게 중얼거리며 기지개를 켰다. 아야, 나도 모르게 소리가 튀어나왔다. 문에 부딪힌 손등이 아팠다.
문고리를 돌려 밀고 부엌으로 향했다. 더러운 물컵들 중 하나를 골라 한 번 씻어 물을 받았다. 방으로 돌아가 조용히 물을 마시려는데 벽이 미세하게 흔들거렸다. 작게, 작게, 더 작게, 억누르는 신음과 함께 방이 움직였다. 물을 머금고 바닥에 누워 꼴꼴거리며 물을 넘겼다. 컵이 더러워서인지 물맛이 더러웠다.
부엌에 물컵을 갖다 놓고 오다 옆 방에서 나오는 남자와 마주쳤다. 몸을 돌려 비켜 줬다. 여성 전용 고시원인데, 간혹 남자들과 마주친다. 그가 목발을 짚고 쿵쿵거릴 때마다 헝클어진 머리카락이 고시원 벽과 함께 흔들렸다. 남자는 나가다 말고 총무 아저씨와 인사를 했다.
징검다리처럼 뚝뚝 떨어진 기억들 사이로 남자의 모습이 오락가락하며 필름이 되감기다 멈췄다. 오늘 새벽 6시께 편의점에서 콘돔을 사 갔던 남자다. 목발을 짚고 와서 콤돔을 두 개 사 갔다.
나머지 하나는 언제 쓸까, 문득 궁금해졌다.
고시원에 대한 기억은, 이런 것들. 과제 파일 사이에 끼어 죽어 있던 개미떼, 갈라진 타일 바닥, 더러운 녹색 물컵, 누런 찌꺼기들이 들러붙어 있던 밥-수입 쌀로 지은, 옥상에서 빨래를 널 때 가끔 마주쳤던 이름 모를 여자들, 복도와 계단에서 스쳐지나간 그녀의 남자들.
그리고 계단 옆에 놓여 있던 스펀지가 튀어나온 소파에 앉아 담배를 피웠던 기억 따위. 옥상 문틈으로 새 나오는 햇빛이 담배를 든 손가락 끝을 환하게 만들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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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LoveLoveLove  (2) 2023.05.19

오늘 하늘


버스 정류장에서 사진을 찍는 남자를 보았다. 그 남자는 버스 정류장의 풍경을 줌을 당겨서 몇 컷 찍고는 하늘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는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나는 버스 정류장으로 향하면서 그 풍경을 그저 바라보고 있었다. 가까이 가면서 눈에 들어온 남자의 옆모습은 날카로우면서 매끈한 콧날이 인상적인, 동그라면서 뾰족한 턱선이 묘하게 아름다운 얼굴이었다.
나는 따라서 탄 게 아니라 내가 타야 할 버스였기에 그 남자와 같은 버스를 탔다. 우연히도 그 남자의 뒷자리에 앉았다.
그 남자는 SNS에 <오늘하늘>이라는 해시태그를 달아 사진을 업로드하였다. 아이디는 꽤 길어서 한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나는 나도 모르게 즉각 그 해시태그로 검색을 해 보았다. 시간순으로 하니 그 사진이 맨 위에 떴다. 나는 그 화면을 캡처하였다. 남자의 뒤통수와 내 휴대폰을 번갈아 바라보며 그 남자 계정의 다른 사진들을 보았다. 얼굴 사진은 하나도 없었다. 프로필 사진조차 하늘 사진이었다. 가만히 보니 해시태그도 딱히 달려 있는 게 없었다. 아이디는 나의 줄리엣, 그리고 햄릿에게 뭐 이런 아이디였다.
누구일까, 이 사람의 줄리엣은. 햄릿은 누구지? 본인인가?
나는 어설픈 질투를 느끼며 내릴 준비를 했다. 남자는 내릴 준비를 하지 않고 있었다. 가만히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회색 건물들과 커다란 간판들이 스쳐 지나는, 별 다를 것 없는 거리 풍경을.
내 계정에는 몇 달째 아무 글도 올리지 않고 있었다. 정확히는 썼다 지웠다를 반복하고 있었다. 죽음만을 기다리는 이 삶에 어떤 의미가 있을까 뭐 이런 글들을 썼다 지웠다 하고 있었다.
사진이라고는 꽃 사진 정도였다. 그리고 간혹 내 발 사진 따위를 올렸다 지웠다 하고 있었다. 누가 날 알아볼 수도 알아볼 수 없을 수도 있는 발 사진을.
내가 내리려 하차벨을 누르고 문 앞에 섰는데 누가 내 뒤에 서는 게 느껴졌다. 묵직한 아우라. 따뜻한 체온이 약간 느껴지는 커다란 사람.
나는 내린 뒤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뒤를 돌아보다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고개를 돌렸다.
남자는, 나를 순간적으로 빤히 바라보았다.
어쩌면 모든 걸 들켰을지도 모른다.
남자가 나를 불렀다.
"저기요."
나는 흠칫 하였다. 내가 뒤에서 쳐다보며 자기 SNS 계정까지 알게 된 걸 들켰으면 어쩌지.
"예?"
"교통카드 떨어뜨리셨어요."
남자의 손에는 내 교통카드가 들려 있었다.
"아아, 엇, 죄송합니다. 감사합니다."
나는 교통카드를 받아들며 머뭇머뭇 인사하였다.
이 사람과 지금 헤어지면 다시 볼 날이 있을까. 순간적으로 별의 별 생각이 다 스쳐 지나갔다.
나는 뒤돌아서 갈 길을 갔다. 그래야만 하는 것이었다.
나는 걸어가며 아까 캡처한 스크린샷 파일을 지웠다.
땅만 찍어서 올렸다 지웠다 하는 나와 하늘만 찍어서 올리는 저 사람 사이에 교차점이 있을까.
나는 내가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는 편의점으로 들어갔다. 회사를 관두고 몇 달째 백수 생활 중이던 내가 가까스로 구한 아르바이트 자리다. 근근이 생활비만 버는 정도지만 이걸 관두면 뭘 할 수 있을지 몰라 관둘 수가 없다. 그리고 돈 문제만 빼면 회사보다 여기가 낫다. 스트레스받는 걸로 따지자면. 결국 난 남들이 비웃는 서른 넘어 알바나 하는 인간밖에 될 수 없나 보다 생각하면서도 결론이 그렇게 난다. 다음에 또 누군가가 날 비웃으면 알바라도 하는 게 어디야 하며 나도 콧방귀를 뀌어 줘야지 생각한다.
나는 옷을 갈아입고 나와 계산대 안으로 들어갔다. 중학교 근처라 중학생들이 많이 오고 평소에는 그냥 동네 사람들이 오가는 듯한 그런 편의점이다. 제일 잘 팔리는 건 빵과 삼각김밥 따위.
유리문 밖으로 아까 그 사람이 지나가는 게 보였다. 버스에서 내리고 난 뒤 지나가기에는 시간 차가 좀 있는데 뭘 하고 돌아가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편의점에 들어와 줬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 인연이 될 수 없더라도 단골 손님이라도 돼 줬으면 싶었다.
손님이 없을 때면 매장 정리 등을 하고 그러고 시간이 빌 때면 그냥 유리문 밖을 바라보곤 한다. 그 남자는 내가 아르바이트를 하는 다섯 시간 사이 몇 번이고 유리문 앞을 지나갔다.
대체 뭐하는 사람일까.
다단계 직원? 보험? 뭐하는 사람일까.
그나저나, 단지 얼굴이 곱상하게 생겼다는 이유로 난 사랑이란 것에 빠져 버린 걸까?
한심하다. 그러니 나이 서른 넘어 회사 관두고 이직도 못하고 겨우겨우 다른 동네 편의점 아르바이트나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동네에 사람이 별로 안 사는 건지 몇 달이고 공고가 올라와 있던 편의점. 이력서를 넣었는데 연락이 오지 않아 내가 전화를 걸어 몇 주 만에 합격 통보를 받은.
어쨌든 이제는 돈 벌어 먹고살 수 있어 다행이다 생각하며 저 남자는 뭐하는 사람일까 생각하고 있는데 남자가 유리문을 열고 들어왔다.
"디스 한 갑 주세요."
날 알아보긴 했으려나 싶으면서도 알아봤다 해도 아는 척은 안 하겠지 싶어 우울감을 느끼며 디스 한 갑을 건네고 계산 처리를 했다.
디스. THIS. 이것. 여기 내 눈 앞에 있는 이것.
이 사람은 영영 떠나가겠지.
싶었는데 가게 앞 흡연소에 앉아 담배를 피운다. 한 갑을 다 피울 기세다.
청소를 해야겠다 싶어 나가 보니 재떨이에 이미 꽁초가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잠깐 이것 좀 치워도 될까요?"
남자는 나를 쳐다보지도 않고 "예."라고 대답한다.
나는 쓰레기 봉투에 재떨이를 넣고 뒤집어 꽁초를 턴 뒤 재떨이를 제자리에 돌려 놓았다.
"쓰레기는 내가 치워도 되는데."
고개를 돌리니 다음 타임 아르바이트 아저씨가 서 계셨다.
"아, 네. 벌써 시간이..."
"퇴근할 준비해."
"예."
남자는 그냥 담배를 피우고 있다.
이렇게 난 하루 동안 사랑에 빠졌다 집에 가서 발 닦고 자는 건가.
옷을 갈아입고 나와 버스 정류장으로 향하는데 가게를 흘긋 돌아보니 남자가 뒤따라온다.
"저기요."
"네?"
"혹시 몇 주 전에 동네 매물 사이트에서 저한테 책 한 권 나눔하셨던 것 기억 나세요?"
"... 아... 혹시 후드티 뒤집어쓰고 나오셨던 분이신가요?"
"예."
"책 수십 권을 나눔한 터라 바로 기억을 못했나 봐요. 그런데 책에 무슨 문제라도 있던가요?"
남자가 그제서야 웃는다.
"그게 아니라 책에 밑줄 그어 놓으신 부분이 너무 와닿아서요."
중고로 팔아 봤자 돈도 안 되고 스트레스만 받아 그냥 다 나눔한 책 중 한 권이었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책인데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책이었다. 한 권을 나눔한 건 이 사람뿐이었다.
"제가 좋아하는 책이었는데 저도 예전에 나눔했어서, 근데 또 읽고 싶어졌던 차에 나눔하시는 걸 보고 받아갔었는데요. 제가 좋아하는 부분에 밑줄을 그어 놓으셨더라고요."
"죄송해요. 형광펜으로 그어서 지울 수가 없어서... 음..."
머릿속이 혼란스럽다. 뭐지? 공감대 형성?
아마도... 죽고 싶을 때 바닐라 아이스크림을 먹으면 더 맛있게 느껴진다, 일부러 슬픔을 찾아다닐 필요는 없다... 이 두 문장이었을 것이다.*
이 사람도 슬픈 걸까. 하늘을 바라보고 하늘 사진을 올려대는 이 사람도. 땅만 쳐다보다 꽃 사진을 찍어대는 나처럼...?
"친구가 되고 싶어서요. 저도 백수 생활하다가 지금 옆 동네 아는 분 호프집에서 알바하고 있지만... 그러니까... 돈은 별로 없지만 그냥 친구라도 되고 싶다고 생각하던 차에... 기분 전환 겸 낮에 나와 봤는데 우연히 만나게 돼서 따라와 봤어요."
요즘 세상에는 하도 무서운 일이 많아 이런 것도 다 경계해야 한다고는 하지만 백수 생활 시작과 동시, 아니 서서히, 친구를 다 잃어 버리고, 아니, 내가 도망쳐 버린, 그래서 어쨌거나 결국 친구를 다 잃은 나로서는, 이 사람과 친구가 되어 보고 싶다는 생각이 안 들 수가 없다는 생각을 하였다.
순한 눈.
순해 보인다고 다 믿을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제가 월급 타면 술 한 잔 하러 가게 호프집 주소 좀 알려 주실래요? 검색하면 나오나요?"
"ㅇㅇ 비어예요. 이 옆 동네예요. 전 이제부터 알바하러 가는 건 아니고... 괜찮으시면 오늘 같이 한잔 하러 갈까요?"
"아직 월급을 못 받아서... 음... 동네 가서 슈퍼 가서 한 캔씩 사도 될까요?
남자가 또 웃는다.
우리는 같이 버스를 타고 같이 내렸다.
아직 저녁 여섯 시밖에 되지 않았다. 맥주 한 캔쯤 괜찮겠지.
어쩌면 이 사람과 평생 친구로 지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관두지만 않으면 이 알바는 언제까지고 할 수 있는 거려나, 나이 더 먹으면 노령연금이 나오겠지 삼십 년 뒤인가? 이런 생각을 하며 나는 슈퍼로 들어갔다. 친구를 사귀는 데도 돈이 필요하니까. 살아 있으려면 당연히 그러니. 이런 말로 넘어가기에는 나는 돈 걱정을 너무 많이 하긴 하지만 뭐 어쨌거나.
살아 있는 동안 이 사람과 친구로 지내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나는 맥주캔 하나를 집어들었다.

ㅡ 끝 ㅡ

*에밀 아자르(로맹 가리) 「자기 앞의 생」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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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소설] 노란 캐리어
(2013~2014년쯤 쓴)


끼이익 소리를 내며 한 여자가 들어선다. 좁은 현관에 발을 디디고 서 있는 모습이 왠지 아슬아슬해 보인다. 신발을 벗고 고개를 들자마자 목례를 한 후 이름을 말하는 그녀.
꽉 찬 신발장을 위아래로 훑더니 신발장 위에 신발을 올려놓는다.
"예약 확인 부탁드립니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더니 다시 고개를 돌려 등에 멘 배낭에서 주섬주섬 종이 한 장을 꺼낸다. 나는 종이를 복사한 후 그녀에게 돌려주었다. 정말 일부러 그런 건 아니지만, 원래대로 손바닥만하게 접은 종이를 돌려줄 때 그녀의 손등을 살짝 만져 버렸다. 내 손가락 위에 그녀의 손등, 그녀의 손바닥 위로 내가 올린 종이 한 장, 그 위로 파르르 떨리는 내 손가락.
숙소를 안내하기 위해 안내 데스크에서 나와 그녀의 옆에 선다. 노란 머리 색깔과 똑같은 노란 캐리어를 든 손이 힘겨워 보인다.
나는 남자답게, 가볍지 않은 그녀의 캐리어를 가볍게 들어 방까지 안내한다. 그녀는 작은 목소리로 고맙다고 말하며 내 뒤를 졸졸 쫓아온다. 나는 그녀가 잘 따라오고 있는지 슬쩍 고개를 돌려 확인한다.
오래된 주택을 개조해 만든 2층짜리 게스트하우스의 계단은 조금만 힘을 줘 걸어도 삐걱 소리가 난다. 여성용 공동 침실 안에는 이층 침대 네 개가 있다. 지금 남은 자리는 두 곳. 하나는 아래층이라 편하지만 머리맡 쪽의 커튼이 제대로 닫히지 않는다. 하나는 넓지만 문 바로 앞이고 이층이라 계단을 오르내리기가 약간 무서울지도 모른다.
"어느 쪽이 좋으세요?"
내 설명을 제대로 듣고는 있는 건지 두리번거리던 그녀가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어느 쪽이든 괜찮다고 말한다.
"그럼 여기로 할게요. 1번 자리예요."
'네-' 그녀의 작은 목소리가 귓가에 웅웅거린다.
"여긴 문 앞이라 캐리어를 놓기가 좀 그런데 다른 분 침대 앞에 같이 두실래요, 아님 침대 위에 놓으실래요? 공간은 있으니까."
그녀가 다시 두리번거리며 입술을 살짝 뗐다 깨물었다 뗐다 깨물었다 한다.
"가까운 데가 좋아요, 떨어진 데도 괜찮아요?"
그녀가 살짝 미간을 찌푸린다.
"아, 짐이 너무 무거워서 위에 올리기는-"
나는 그녀의 말을 듣다 말고 남자답게 캐리어를 번쩍 들어 이층 침대 위에 올린다. 남자는, 말보다 행동이다.
그녀가 눈을 크게 뜨며 짐이 무거워서 죄송하다고, 고맙다고 말한다. 조금 무겁긴 했다. 그렇다고 미안해 할 건 없는데. 나는 이런 일을 하라고 돈을 받는 사람이니까.
"궁금하신 게 있으시면 질문하세요."
넓지도 않은데 이층 침대가 네 개나 있어 여유 공간이 많지 않은 방에 그녀와 너무 가까이 서 있다. 양 옆에서 침대들이 나를 조여 오는 것 같다. 내 고개 아래 서 있는 그녀가 고개를 들어 좌우로 살짝 흔든다. 흔들리는 머리카락에서 나는 샴푸의 체리 향이 너무 가까워서 나도 모르게 숨을 참아 버렸다.
"없어요."
"그럼 편히 쉬세요."
돌아서서 문을 닫는다. 그녀가 계단을 살금살금 올라가는 소리가 작게 작게 들린다. 속도가 느리다. 역시 무서운 걸까. 이층 침대의 계단은 좁고 가파르다.
다시 데스크 안으로 들어선다. 화면 보호 상태로 바뀐 컴퓨터의 마우스를 잡고 두어 번 흔드는데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린다. 이번 손님은 진짜 금발이다. 침대는 커튼이 잘 닫히지 않는 자리로 확정이다.
이층으로 올라가는 동안 커튼에 대해 설명하며 양해를 구한다. 나보다 키가 큰 금발의 손님은 오케이라고 말하며 내 뒤를 성큼성큼 따라온다.
문을 열고 방으로 들어서며 이층의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문 열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을 테지. 씻을 준비를 하는 건지 어깨까지 오는 단발머리는 흐트러져 있고 손으로는 짐을 뒤적거리고 있다. 빨갛고 도톰한 입술은 아까부터 아주 살짝 벌어져 있다.
나는 황급히 고개를 앞으로 돌리고 다시 영어로 말하기 시작한다. 이런, 갑자기 R 발음이 잘 안 되는 것 같다. 금발의 손님은 질문이 많다. 나는 문 쪽을 힐끔거리며 열심히 대답을 한다. 갑자기 커튼이 닫힌다. 내가 힐끔거리는 걸, 봤을까.
오늘 오기로 한 손님은 다 왔다. 이제 딱히 할 건 없다. 누군가 조심조심 내려오는 소리가 들린다.
그녀가 다가와 초콜릿 과자를 내민다.
"짐이 너무 무거워서 죄송했어요."
"괜찮아요. 별거 아닌데."
"아니에요. 죄송해요."
"감사합니다."
그녀가 목례를 한 뒤 사라진다.



아침 7시 55분. 데스크의 문을 열고 컴퓨터를 켠다. 본체가 부르르 떨리며 모니터에 불이 들어온다.
손에 휴지 두 개를 들고 이층으로 올라간다. 화장실 문을 열고 휴지를 채워 넣는다. 화장실 쓰레기통은 아직 반도 차지 않았다. 방 안의 휴지통은 비워야 할까. 조심스레 문을 연다. 이층의 커튼이 열려 있다. 하얀 시트 위에는 그녀의 노란 머리카락.



저녁 7시 55분. 문이 열리며 그녀가 들어온다. 노란 머리가 살짝 젖어 있다. 소나기 예보가 있었는데, 우산을 들고 가지 않았나 보다. 나는 여느 때와 같은 인사말을 하고, 그녀는 살짝 목례를 한다.
"우산 필요하시면 저한테 말씀하세요. 구비하고 있는 게 몇 개 있으니까."
그녀가 신발을 신발장에 넣다 말고 고개를 돌린다.
"저도 우산 있어요. 오늘은 그냥."
그녀가 머리를 만지며 멋쩍게 웃는다.
물에 젖은 체리 향이 문득 가까워졌다. 붉은 입술이 열리며 무언가 소리가 튀어나온다. 갑자기 숨을 참아서인지 문득 어지럽다.
"… 옥상이 있나요?"
그녀의 분홍색 티셔츠에 간간이 찍혀 있는 붉은 얼룩.
"빨래 너시게요?"
그녀가 잠시 눈을 깜빡거린다.
"아, 그냥, 술을 좀 샀는데, 혼자 있고 싶어서."
그러고 보니 그녀의 손에 하얀 편의점 비닐 봉지가 들려 있다.
"아, 어쩌죠, 여긴 옥상은 없어요. 오래된 주택을 개조해서 만든 거라서."
갑자기 내 목소리가 크게 들린다. 데시벨을 낮춰야 하는데. 그녀는 왜 혼자 술을 마시고 싶은 걸까. 비까지 맞고서.
"저도 옥상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때가 있는데, 아, 죄송해요."
쓸데없는 말이 자꾸 입에서 튀어나온다. 데시벨은 내려가지 않는다.
"아, 네. 알겠습니다. 감사해요."
방으로 향한 그녀의 뒷모습이 머물렀던 자리를 바라본다. 한숨도 못 잔 사람처럼 자꾸 멍해진다.
시야에 갑자기 그녀가 나타난다. 눈이 마주치자 그녀가 살짝 웃어 보인다. 정신을 차리고서 나도 웃는다. 그녀는 다시 빛의 속도로, 그러나 아주 띄엄띄엄, 사라진다. 마구 자른 필름을 엉성하게 이은 것처럼 그녀의 움직임이 끊어져 보인다.
파전 냄새가 난다. 비 오는 날엔 역시 파전이다. 이런 날엔 나도 한잔 하고 싶다.
체리 맛이 날 것 같은 이상한 파전 냄새가 난다. 고개를 드니 그녀가 서 있다. 머리는 말라 있고, 옷의 붉은 얼룩도 보이지 않는다.
"파전 좀 드실래요?"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나는 것 같다.
"아, 좋죠, 파전. 근데 저 주셔도 돼요? 양이 많지 않은 것 같은데."
"저녁을 먹고 와서요."
그녀가 은박지 뭉치, 젓가락을 내게 건넨다.
"감사합니다."
손 안이 따뜻해진다.
"근데 혹시 여기 근처에 공원이 있나요?"
"아, 한 20분 정도 걸어가면 아주 큰 공원이 있는데, 호수도 있고. 근데, 음, 거긴 너무 크고 별로 안 가까워서. 음, 작은 공원도 근처에 있을 텐데, 어디였더라, 그게. 음, 아주 작은 공원이 있었던 것 같은데, 하하."
또 데시벨이 올라갔다. 헛웃음이 나온다. 그녀는 빤히 나를 보고 있다. 그녀는 작은 공원이 좋다고 말한 적이 없다. 혼자 있고 싶다고는 했지만 공원 크기와는 상관이 없다. 나는 왜 작은 공원을 떠올리려 애쓰고 있는 걸까. 그녀를 찾으러 갈 것도 아닌데.
"아, 여기서 왼쪽으로 5분쯤 가다가 주유소 있는 데서 오른쪽으로 꺾어서 10분쯤 가면 작은 공원이 있어요. 놀이터도 있고, 옆에 강도 있어요. 작긴 한데 벤치도 있고 앞에 슈퍼도 있어요. 경치도 괜찮고 있을 건 다 있으니까. 음, 거기가 좋을 것 같은데."
"아, 네. 감사해요."
허둥거리며 말하는 나를 가만히 보고 있던 그녀가 목례를 한 후 신을 신고 총총 사라진다. 흔들거리던 하얀 비닐 봉지의 잔상.
나는 자리를 뜰 수 없다. 나는 여기 있으라고 돈을 받는 사람이니까. 고개를 숙이고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싼다. 한동안, 한동안.



현관 앞에 그녀의 노란 플라스틱 캐리어가 놓여 있다. 아침을 먹은 건지 부엌에서 나오는 그녀와 스쳐지나며 인사를 했다. 밝게 인사하려고 했는데 목소리가 늘어져 버렸다. 그녀는 목소리를 내지 않고 목례를 한 후 스쳐갔다.
시간 맞춰 오느라 미처 다 말리지 못 한 머리를 말린다. 세면대 앞에 서서 드라이기를 켜고 머리에 뜨거운 바람을 쏘인다.
그녀는 조그만 가글 한 통을 들고 내 옆을 지나 세면대 끝 자리에 선다. 그녀의 볼이 부어오르고, 작고 빠르게 떨린다. 고개를 숙이고 하얀 거품을 뱉어 낸다. 그녀의 휘어진 등 위로 뻗어나가고 싶어하는 손에 힘을 주고 머리를 매만진다.
데스크로 들어가 컴퓨터를 켜는데 그녀의 목소리가 들린다.
"지금 체크 아웃 할게요. 감사했습니다."
"아, 네."
웃으면서 배웅의 말을 해야 하는데, 가라앉은 목소리의 단답밖에 나오지 않는다.
현관 앞에서 그녀가 머뭇거린다. 바닥에 신발이 너무 많다. 그녀의 캐리어가 더욱더 무거워 보인다. 그녀가 캐리어를 들어올리려 낑낑거린다. 캐리어는 들어올려지다가 아주 빠르게 내려오고 다시 들어올려지다 다시 빠르게 떨어진다.
"괜찮으세요?"
그녀는 멋쩍게 웃어 보이고서 신발에 닿지 않을만큼만 캐리어를 들어올려 밖으로 빼낸다. 손잡이를 붙잡은 어깨가 가라앉아 있다.
"조심해서 가세요."
가끔은, 행동보다 말이 필요할 때도 있지만 말다운 말이 생각나지 않는다. 내가 입을 움직이는 짧은 시간, 눈을 깜빡이며 나를 바라보는 그녀.
"감사했습니다."
내 말이 끝나자 그녀는 살짝 웃어 보이고서는 아까 했던 말을 반복한 뒤 목례를 하고 사라졌다.
나는 제대로 닫히지 않은 문을 닫는다. 문 너머에 아직 서 있을까. 내가 문 닫는 걸 봤을까. 안녕, 잘 가요.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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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LoveLoveLove
(2018년 작)


널 보고 있어도 난 그립기만 해
널 그리워하면서도 그립기만 해
너에게 닿고 싶어 난 손을 뻗지만
그 거리는 언제나 내게는 멀기만 해

―S < I miss U > 중에서

스마트폰 화면을 뚫어져라 바라본다. 거기에 내 사랑이 있다.
사랑이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을 거의 100% 확신하고 있는 상태에서 누군가를 열렬히 좋아한다는 게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사랑을 바치는 상대가 내게 차가운 눈빛으로 이별을 고한다거나 가시 돋친 말로 상처를 줄 일도 거의 100% 없을 거라는 점에서 꽤 안전한 일이기도 하다. 혼자 꿈꾸는 아름답고 안전한 사랑에 일단 길들여지면 여기에서 벗어나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나는 3년째 한 사람을 사랑하고 있다. 그 사람에게 내 사랑을 고백한 지는 이미 오래되었지만 그 사람이 그걸 기억할지는 모르겠으며, 그 사람이 내게 사랑을 말한 지도 이미 오래되었으나 그 사랑은 정확히 나만을 위한 것은 아니다.
그 사람은 늘 이렇게 말한다.
“팬 여러분, 사랑해요.”
다수에게 바치는 세레나데를 들으며 나는 기뻐한다. ‘나는 비혼주의자이지만 네가 결혼하자고 하면 지금 당장이라도 할 수 있어.’라고 생각하기도 하지만 이건 아마도, 그런 일이 생길 가능성이 거의 없기 때문일 것이다.
그에게는 그를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수만 명의 팬이 있으나 나는 부모님에게서도 그런 맹목적인 사랑이나 믿음을 받아 본 적이 없다. 나는 수만 명의 팬 중 하나일 뿐이고, 사람을 가장 빨리 판단할 수 있는 기준인 겉모습으로 평가한다고 했을 때 그 수만 명 중에서 과연 몇 등이나 할 수 있을지 가늠조차 불가능하다. 수만 명의 팬들 속에서 운 좋게 그의 눈에 띄어 정말 프러포즈를 받게 된다고 하여도, 나는 아마 내 자신이 부끄러워서 옆에 서지도 못할 것이다. 키는 177cm로 엄청 큰 키는 아니지만 얼굴이 작아 9~10등신은 족히 돼 보이는 그의 옆에 서 있는 나를 상상하기만 해도 왠지 울적해진다. 내가 그와 어울릴 만한 인물이었다면 난 그의 팬이 되는 대신 연예인 지망생이 되었을 것이다. 지금 이 상태 그대로이더라도, 내가 그와 정말 사랑에 빠지고 싶었다면 성형을 하든 지옥 다이어트를 하든 로비를 하든 뭘 하든, 어떻게든 연예인이 되려고 했을 것이다. 내가 정말로 그와 쌍방향 사랑에 빠지고 싶었더라면.

내가 좋아하는 그는 S라는 그룹의 여덟 멤버 중 한 명이다. 메인 보컬도 아니고 랩퍼도 아니고 아티스트형 싱어송라이터도 아니고 개그 담당도 아니다. 노래도 보통이고 랩도 보통이고 춤도 보통이지만 얼굴과 사랑스러움만큼은 원톱인, 그런 멤버다. 그는 예쁘고 잘생긴 얼굴과 해맑은 미소로 사랑스러움을 발산하며 수십 만의 팬카페 회원 중 수만 명을 사로잡았다.
나는 태어나기를 일편단심 민들레형으로 태어난 터라 그에게만 애정을 쏟아붓는다. 한 명만 좋아하기에도 돈과 시간이 부족한 마당에 누구를 더 좋아하겠는가.
나는 S 그룹의 공식 팬카페 회원이며 내가 가장 아끼는 멤버인 그, L의 공식 팬카페 회원이고 L의 팬페이지 운영자―전문 용어로 홈마라고 불리는―이기도 하다. 일주일에 적어도 5~6개인 공연 스케줄을 되도록 모두 보러 가서 사진 및 동영상을 찍어 올리는 것이 팬페이지 운영자로서의 내 역할이다.
언젠가 L은 모 라디오 방송에서 팬카페나 팬페이지를 둘러보는 게 취미라고 말한 적이 있는데, 가끔 자신의 SNS에 내가 찍은 사진을 올리기도 한다―한마디로 ‘불펌’이지만, L의 허락 없이 L의 사진을 찍은 것부터가 L의 모습을 불펌한 것이므로, 전문 용어로 쌤쌤(same same)이라고 할 수 있겠다. 내가 찍은 사진이 L이 만들고 L이 관리하는 공간에 올라오면 나는 수만 명―약간 허세를 부리자면―의 팬들이 나를 부러워하고 질투하는 말을 듣는다. L과 내가 꽤 친한 사이일 거라고 떠들어대는 이들도 있다. 물론 이건 사실이 아니다. L은 나를 알기는 할 테지만 내 이름, 정확히 말하자면 내 닉네임만을 알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알려져 있지만 익명의 존재나 다름없다.

유월의 어느 화요일 밤, 여기는 어느 대학교 광장이다. 민주광장이라고 하는데 민주주의와는 아무 관련이 없어 보이는 행사와 사람들로 채워져 있다. 아니, 이렇게 다양한 사람들이 자유롭게 뭔가를 즐길 수 있다는 게 민주주의인가. 그렇다면 여기는 민주주의로 꽉 찬, 그야말로 민주적인 민주광장이다. 아무튼, 나는 S 그룹, 정확히 말하자면 L을 기다리고 있다. 커다란 렌즈를 단 커다란 카메라를 든 채 대학교 축제가 열리고 있는 여기에 서 있다.
S 그룹을 보러 온 듯한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교복을 입은 사람도 있고, 플래카드를 든 사람도 있고, 나처럼 카메라를 짊어진 사람도 있다. 그들은 기다림에 몰두하느라 축제의 민주광장 속에서 축제를 즐기지 않기에 눈에 띈다.
시끄러운 축제의 소리 속에 간간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섞여 들린다. 교복 입고 여긴 왜 왔냐, 저 나이 먹고 가수 쫓아다니고 싶을까, 카메라 비싸 보인다, 돈 많으니까 일은 안 하고 저러고 다니겠지 등등.
10대는 공부는 안 하고 뭐하는 짓이냐는 소리를 듣고, 10대를 넘어서면 애도 아닌 게 뭐하는 짓이냐는 소리를 듣는 게 팬질―팬으로서 하는 모든 일을 흔히 팬질이라고 하는데 좀 더 비하하는 말로는 빠순질이라는 용어가 있다―의 세계다. 그러니까 팬질은, 언제 해도 좋은 소리 듣는 건 힘든 일이라는 것이다.

< 팬질의 단계 >
1단계: 유튜브나 텔레비전 등 방송 보며 좋아하기―이건 보통 시청자들도 하는 일 아닌가 싶을 수도 있지만 수많은 영상을 찾아보며 즐기는 것도 애정이 없으면 할 수 없는 일이다.
2단계: 연예인 SNS나 팬 블로그, 커뮤니티 등을 방문해 ‘눈팅’하기―‘눈팅’은 참여하지 않고 눈으로 보기만 하는 행위를 지칭하는 용어로, 본디 채팅방에서 생겨난 말이나 지금은 두루두루 쓰이고 있다.
3단계: 공식 팬카페나 팬클럽 등에 가입해 공식 팬 되기―누구누구의 팬덤 소속이라는 소속감이 솟아오른다.
4단계: CD, DVD나 음원 등 아티스트의 예술품을 비롯해 기타 굿즈 구입하기―유튜브에서 광고를 시청함으로써 에둘러 돈을 지불하는 방식이 아니라 직접적으로 ‘자기 돈’을 썼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여기까지 오고 나면 발을 빼기가 쉽지 않다.
5단계: 소속사에서 공지한 스케줄에 맞춰 실제로 보러 다니기―돈에다가 시간까지 들어갔다. 학교나 직장을 빠지기 위해 거짓말을 하게 될 수도 있다. 거짓말까지 하면서 보러 간다는 건 일상의 평온이나 양심의 가책보다 ‘내 아티스트’를 눈으로 영접하는 게 더 중요해졌다는 증거다.
6단계: 비공식 스케줄까지 쫓아다니기―이쯤 되면 자기 생활보다 아티스트 영접이 더 중요해진 것으로 보인다. 나는 5단계에서 멈췄으므로 6단계 이후의 심정은 느껴 본 적이 없기에 그저 추측해 볼 뿐이다.
7단계: 사생활까지 쫓아다니기―스토커라고도 불리는 사생팬이 된 것이다. 자기는 없고 아티스트를 보러 다니는 존재만 남게 된 것으로 보인다.

―By LoveLoveLove 홈마 3Love. ―팬질의 단계를 정리해 보았다. 어디까지나 주관적인 것임을 밝혀 둔다.

보통은 5단계부터 ‘빠순이’라는 말을 듣게 된다. 빠순이라는 말을 처음 들으면 기분이 나쁘지만―집창촌에서 생겨난 말이라는, 용어의 유래까지 어디서 듣게 되면 더더욱― 계속 듣다 보면 익숙해져서 스스로 자신을 빠순이라 칭하게 되기도 한다―이런 게 가스라이팅일까?―.
나는 스토커는 아니고 그냥 ‘빠’이다. L은 팬질 5단계까지의 팬들만 팬으로 인정한다고 모 매체와의 인터뷰를 통해 밝힌 바 있다. 허허실실하며 해맑은 미소를 ‘뿜뿜’하는 L의 모습을 떠올려 보면 “사생팬도 팬이니까 감사하다.”라고 말해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은데, 단호해야 할 때는 단호하다고 할 수 있다―이런 카리스마에 내가 또 반한다. 나는 L에게서 미움받으면서까지 L에게 다가가고 싶지는 않다. L이 내 실체를 알게 되는 것도 원하지 않는다. L이 개인인 날 보는 순간 난 부서져 버릴지도 모른다. L이 실재하는 나를 알 수 없기 때문에, L에게 나는 군중으로서 존재하기 때문에 나는 L을 사랑한다.

무료했던 한낮, 무가지의 연예면에서 L의 존재를 알게 됐었다. 여덟 명이나 되는 남자아이들이 얼굴을 모으고 찍은 사진 속에서 L이 눈에 띄었던 이유는 단지 머리카락이 아주 붉었기 때문이었다. 새빨간 머리만큼 붉었던 입술, 그것들과 대비됐던 새하얀 얼굴. 별 생각 없이 무가지를 훑어본 뒤 나는 그것을 버렸다. 내가 L을 잊지 않게 됐던 건 무가지 때문이 아니었다. 무가지를 버린 지 10분도 채 지나지 않아 나는 L을 실제로 보았다. 아직 신인이어서였는지 L은 아무렇지 않게 지하철을 기다리고 있었다. 새빨간 머리와 잘생긴 얼굴, 탁월한 패션 감각이 지나가던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지만 아무도 그가 L이라는 사실은 모르는 것 같았다. 나는 어디에서 많이 본 것 같다고 생각하며 L을 쳐다보다 L과 눈이 마주쳤고, 순간 무가지에서 봤던 L과 내 앞에 있던 L이 겹쳐졌다. L은 너무나도 하얘서 반짝반짝 빛이 났고, 새빨간 머리카락과 입술은 금방이라도 터져서 피가 흘러넘칠 것만 같았다. L은 이내 내게서 시선을 거뒀지만―길거리에서 자신을 쳐다보는 모르는 사람들이 어디 한둘이었겠는가!― 나는 하얗고 빨간 L을 쳐다보다 지하철을 놓쳤다. 지하철 유리문 너머에 있던 L의 모습이 빠른 속도로 멀어져 갔다. 붉은 흔적만이 내 눈동자 속에서 날 어지럽혔다.
나는 다시 무가지를 가지러 갔고, L이 속한 그룹명 등을 확인한 뒤 곧장 CD를 사러 갔다. CD가 눈에 띄는 자리에 있지 않아 찾는 데 약간 시간이 걸렸다. 그리 힘 있는 소속사는 아닌 모양이었다. 데뷔작인 싱글 음반은 총 아홉 종류였다. 나는 재킷 표지에 멤버 전원의 사진이 실린 것 한 장, L의 사진이 실린 것 한 장, 총 두 장을 골랐다. 한정 수량이라는 포스터는 아직 꽤 남아 있었다.
서랍장을 뒤져 오랜만에 은색 SONY CDP를 꺼내 CD를 들었다. 처음에는 어떤 게 L의 목소리인지 알 수 없었으나 L의 사진이 표지인 CD에 L의 솔로곡이 들어 있었다. L의 목소리에서는 창백하면서도 따스한 느낌이 났다.

눈을 감으면 너의 모습이 보여서
손을 뻗으면 꼭 닿을 것만 같아서
눈을 뜨면 네가 사라질까 두려워
눈을 뜰 수 없어 눈을 뜰 수 없어
눈을 감은 채 그저 어둠 속을 헤매
눈을 감은 채 허공으로 손을 뻗어
널 찾아 헤매 널 그리며 눈을 감아

―L < Where R U > 중에서

팬들의 괴성이 이어졌다. L이 손을 들어 보이고는 무대 밑으로 내려갔다. 몇몇 사람들은 수많은 사람들 틈을 비집고서 S 그룹 멤버들이 가는 방향으로 뛰어갔다. 나는 여느 때처럼 그냥 잠시 가만히 서 있었다. 축제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팬들이 빠져나간 자리는 이내 다른 사람들로 채워졌다. 세상에는 사람이라는 존재가 많고도 많아서 빈 자리가 금세 채워지고 떠난 사람이 쉬이 잊혀진다. L도 나도 이 점은 마찬가지다. 그래도 누군가의 기억에서 생존할 가능성이 더 높은 사람은 당연히 L이다. 내가 그를 기억할 것이고, L에게는 그를 추앙하는 수많은 팬들이 있으니까.
나는, 나를 기억해 줄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다. 팬페이지 LoveLoveLove 홈마 3Love로만 내 존재를 인지하고 있을 L이 날 기억해 줄까? L이 날 기억한다 해도 그건 현실의 내가 아니라 그저 홈마 3Love라는 아바타를 기억하는 것일 테다. 수많은 팬페이지 중 하나인 LoveLoveLove에 들어올 팬들도 마찬가지다. 그들에게 나는 어느 개인이 아니라, 홈마이다.

사랑한다 소리치고
내 곁에서 사라진 너
날 보면서 웃었던 너
날 보면서 울었던 너

어쩜 그렇게 가볍게
어쩜 그렇게 차갑게
떠나가는 건 한순간

그래도 즐거웠어 나
그래도 고마웠어 나
내가 널 기억할게
내가 널 사랑할게

―S < I remember U > 중에서

캄캄한 밤 외로이 도로를 질주하는 심야고속버스 속에서 L의 목소리가 담긴 노래를 들었다. 불과 2~3시간 전에 보았던 사람인데 지금은 닿을 수 없는 거리에 있다. 말할 수도 만질 수도 없는 사람을 맹목적으로 쫓는 나는 왜 이러고 있는 걸까. 생각하고 생각하면서 L의 사진과 영상이 담긴 DSLR 카메라를 꺼내 L의 모습을 돌려 본다. 작은 액정 속에 담긴 L은 이미 지나 버린 시간이다. 지나간 사람이다. 사진을 보며 눈으로는 울고 입으로는 웃고 있는 나. 화면이 흐려진다. L을 바라보다 돌아오는 길에는, 바라만 보다 돌아오는 길에는 늘 눈물이 난다. 굵은 물방울이 뚝뚝 떨어져 내린다. 보고 또 봐도 나는 외롭다. 보지 않으면 아프다. 아픈 것보다는 외로운 게 낫다고 생각한다. 지금은. 지금의 나는.

급히 화장실에만 다녀온 뒤 방바닥에 퍼질러 앉아 노트북을 켰다. 카메라를 연결한다. 몇 시간 전에 찍은 L의 모습들을 불러오고 정리한다. 흔들린 사진도 지우지 않는다. 언제나 내 곁에 있을 수 없는 L의 1분 1초가 내게는 소중하다.
잘 나온 사진들을 추려 보정 작업을 했다. 몸짓 하나하나가 우아한 L의 모습에 경탄하며 작업을 하고 사진과 영상을 LoveLoveLove에 올렸다. L이 멋지면 멋질수록, 아름다우면 아름다울수록 나는 L에게 찬사를 보내고 그 찬사의 무게에 비례해 나는 짓눌린다.
덧글이 달리길 기다리며 샤워를 했다. 거울 속 내 모습이 내 머릿속 L의 모습과 비교돼 비참해졌다. 이게 현실이라고, 수건으로 내 비루한 덩어리를 닦으며 생각했다.

<< L군, 오늘 진짜 멋있었어! 또 보고 싶다. ―Lomantic
<< ㅠㅠx100000000000000000 ―IinLinS
<< 홈마님 너무 감사해요!!! 직접 못 봐서 늘 아쉬운데, 귀염 뿜뿜 우리 L, 늘 예쁘게 예쁘게 찍어 주셔서 감사해요!!! ―L바보
<< 하앍하앍 //-// ―19L순이
<< 자기 전에 잘생긴 우리 오빠 봐서 너무 좋아요. 감사합니다! ―중L병

스크롤을 내리며 덧글들을 훑어본다. L만을 좋아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단지 자신이 좋아하는 것들 중 하나가 L인 사람들도 있다. 어느 쪽이든, 그들에게 L이란 삶의 따분함을 달래 주는 게임 같은 게 아닐까. 캐릭터를 바꿔 가며 즐길 수 있는 게임, 게임 자체가 질리면 지우고 다른 게임을 할 수도 있는 게임. 마음 한구석에 늘 빈 자리가 있고, 그게 너무 공허해서 누군가를 앉혀 놔야만 하는 것. L 대신 다른 누군가가 그 빈 자리에 들어와도 그들 삶에는 별 지장이 없을 것 같은 것. 나를 비롯해.
허무한 짓이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나의 눈은 L을 보고 황홀해 하고 나의 귀는 L을 듣고 녹아 내린다. 내 이부자리 위 천장에 붙여 놓은 L의 포스터를 보며 잠드는 나는 꿈속에서도 L을 볼 수 있기를 기대한다.

눈을 감은 채 그저 어둠 속을 헤매
눈을 감은 채 허공으로 손을 뻗어
널 찾아 헤매 널 그리며 눈을 감아

―L < Where R U > 중에서

* 본 소설에 나오는 단체, 인물, 가사 등은 모두 작자의 창작이며, 혹여 실재하는 무엇과 비슷한 정황이 있더라도 관련이 없는 허구임을 알려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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