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때 받았던 인쇄물들의 스테이플러 심을 뜯어내다
내가 불행했던 것만은 아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런 소포 봉투 속에 뭐가 들었는지 보려다 오래된 편지들을 읽고서도 그런 생각이 들었다

오늘이 삶의 마지막 날인 것처럼 정리를 한다

내 사진 수백 장을 버리고
추억이 담긴 물건들을 버리고

얼마만큼 비워야 속이 후련해질까 생각한다
(아마도 모든 걸 다 버려야)

정리하고 정리당하고
삶이라는 게 원래 이런 걸까 생각하며
쓰레기와 분리 수거 대상물을 분리한다

나 같은 인간은 살 가치가 없다고 내 스스로 결론을 내린다
그리고 정리를 한다
인간관계 및 물건들을

내가 1년 뒤 10년 뒤에도 살아 있을지 알 수 없다
다만 나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는 오래 살고 있다
오래 살고 있기에 불행하냐고 하면 그렇다고 대답하겠지
살다 보니 이 나이가 되었다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나이만 먹은 사람이 되었다

나에게 왜 그런 식으로 생각하고 왜 그런 식으로 사느냐고 하는 사람은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

다만 내가 후회할 뿐이다
내가 살아온 삶의 방식을
서른 즈음 죽는다는 전제하에 살았던

방에는 데이트용으로 산 연보랏빛 가방이 있고
데이트는 하지 못했다
앞으로도 못할 것 같지만 가방을 버리지는 않는다

마흔 즈음 죽는다는 생각은 이제 하지 않기로 한다
서른 즈음 죽는다는 생각으로 20대 30대를 망친 것으로 족하다

아직도 정리해야 할 물건들이 많지만 그냥 둔다
내 20대의 기록들을 정리한 것만으로도 됐다
잘못된 선택들로 채워진 20대를 추억하는 건 고통이다

삼십 몇 년간의 인연을 다 정리한 내가
새로운 인연을 만들 수 있을까 그래도 되는 걸까

내가 곧 죽을 것 같다는 생각하에
내 인생을 망치며 살아온 나로서는
앞으로의 인생을 잘 살아낼 자신이 없다

반평생을 망쳐 놨으니 나머지 반평생은 잘 살아내야 한다고
내 마음이 꾸짖는다
(반평생이 아닐 수도 있지만)

정리를 하다 지쳐 되는 대로 지껄인 끄적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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